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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읽기 2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5.

2019년 8월 30일 금요일 새벽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24장 42절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길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잡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코 복음 13장 32-37절.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복음 17장 21절

 

언제 마지막이 올지 모른다. 그 날은 알 수 없다. 진지하고 치열한 노력이 항상 기쁜 결론으로 마무리 되는 것도 아니다.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어떤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그 날 그 시간도 모르고 그 모습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집회서>의 그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서는 듣지 못하는 자다.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아니, 죽은 이보다 더 슬픈 삶을 살아간다. 하느님이 그의 삶 속 곳곳에 나타나 그에게 전한 지혜를 자신의 아집 속에서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살아도 죽은 듯이 있는 사람이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바로 그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를 향한 것이 아닐까? 비록 지식 가득한 사람이란 말을 듣는 이라도, 성당과 교회에서 오랜 시간 봉사한 사람이라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라도, 그 ‘높임 받음’과 ‘자리 누림’에 빠지면, 잠든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곳에 빠진다면 그는 아집으로 자신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고 그렇게 고정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바로 옆 자리 하느님이 앉아 지혜를 전해도 들리지 않는다. 들을 수가 없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하신다. 그러나 우린 글로 읽고 말로 들어도 그 글과 말에 담긴 지혜는 듣지 못하고 다시 묻는다. “뭐라고요?” 알아듣지 못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어가는 곳이라 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있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De civitate dei)>에서 ‘하느님의 나라(civitas dei)’과 ‘사람의 나라(civitas hominis)’와 구분한다. 사람의 나라는 이기심의 사랑으로 움직인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중심이 되는 누군가의 변두리에서 떨어지는 권세와 이득을 주워 받으려 산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살아 보니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여 다툼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타심의 사람으로 움직인다. ‘나’가 아닌 ‘우리’를 생각한다. 나의 아집과 고집을 위해 거짓을 말하지 않고 남의 아픔을 남의 것으로 두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나의 것이라며 다가간다. 그런 하느님의 나라가 이상적인 교회다. 정말 깨어 있는 자의 자리다. 깨어 있는 자는 거짓 선동자가 이야기하는 여기가 천국이란 말에도 저기가 천국이란 말에도 속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살아가며 깨어 듣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듣고 누군가의 눈물을 본다. 깨어 있는 이는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하느님의 있으심’을 ‘누군가의 아픔’과 ‘누군가의 눈물’로 듣고 본다. 

 

나의 아집이 혹시나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나를 잠재우는 것은 어쩌면 나일지 모른다. 깨어 있자. 깨어 있자. 깨어 있자.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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