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저녁
“어리석은 자에게 말하는 사람은 조는 자에게 말하는 자와 같다. 말이 끝나면 어리석은 자는 ‘뭐라고요?’하고 묻는다. 죽은 이를 위하여 울어라. 빛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울어라. 슬기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이를 두고 그리 슬퍼하지 마라.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 죽은 이에 대한 애도는 이레 동안 계속되지만 어리석은 자와 불경한 자의 일생은 모든 날이 초상 날이다. 미련한 자와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지각없는 자를 찾아가지 마라. 그가 알지도 못하면서 네 모든 것을 경멸하리라. 곤란을 겪지 않도록 그를 경계하고 그가 몸을 털 때 네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여라.” 집회서 22장 10-13절
어리석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고집 가운데 산다. 그에게 아무리 소중한 지혜를 이야기해도 고민하지 않는다. 아예 듣지 않는다. 무엇이 자신의 귀를 울렸는지 그의 영혼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아집 가운데 남을 쉽사리 비난하고 조롱한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의 옆에 있으면 조심해야 한다. 그가 몸을 털 때 난 조롱과 무시의 힘겨운 말들이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아집이란 이렇게 무섭다. 자신도 죽은 듯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고정되어 버렸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이다. 아집은 살아도 죽어 있게 만든다. ‘아집(ātma-grāha)’이란 말은 원래 불교 용어다. 변하지 않은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고집이다. 이에 따라서 표준과 기준도 없이 자기의 의견에만 집착하여 고집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 사람의 고통도 바로 그 아집으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부처집의 말씀이시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나를 아프게 한다. 참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거짓을 참된 것이라 믿게 만들고, 그 가운데 살게 만든다. <집회서>의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말이다. 아무리 소중한 지혜의 말씀이 바로 옆 자리에 다가와 자신과 더불어 있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살아있지만 매일의 삶이 죽음의 삶인 그런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이다. 매일의 일상의 초상 날인 삶인 그런 사람들의 삶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이다. 지금 <집회서>에서 하느님은 ‘슬기’보다 ‘고집’과 ‘아집’에 빠진 이들을 경계하며 그리 살지 말라 우리에게 일러두시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이러한 경계 앞에서도 하느님의 지혜를 보지 못한다. 이 글과 말에 담긴 지혜를 보지 못한다. 그에게 다가가 읽히고 들려도 그는 그만을 생각한다. 그렇게 사람은 ‘나’만을 생각한다.
돌아보자. 과연 나는 얼마나 ‘지혜’로 운가? 작은 지식에 빠져 지혜 없이 사는 것은 아닐까?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경멸하며, 그 경멸의 말재주로 우쭐거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아집 속에서 함부로 남에 대하여 비방하며 우리의 하나 됨을 부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의 욕심으로 가득한 삶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릴까? 양심의 울림으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움직이고 있을까? 십자가의 수난에 담긴 그 지혜의 말씀이 나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어쩌면 나의 삶 동안 쉼 없이 울리는 지혜의 말씀에도 나는 하느님께 “뭐라고요?”라며,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나의 기쁨과 소유를 위한 답을 달라 빈정거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까? 나는 나를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까?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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