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4일 대구에서 광주 가기 전 (200주년 신약성서를 봄)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마르코 복음 10장 45절
뜻을 품고 살아가는 이는 남을 이기고 남을 지배하기위하여 있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강한 힘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며 자신의 아래 두는 주인이 되기 위해 있지 않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왔다. 이미 충분히 강하고 이미 충분히 아시는 분이 작디작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이미 충분하신 분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왔다. 더 강한 강자도 더 큰 주인도 될 필요가 없는 분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왔다. 그 이유는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서다. 자기 살아 있음을 내어 주기 위해서다.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살아있음을 기꺼이 내어주기 위해, 제대로 살아있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사람으로 온 것이다. 아프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첫 째는 남의 앞이다. 더 많이 가짐으로 앞이고 더 강함으로 앞이다. 그러나 그런 앞이 되기 위해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 누군가의 것을 더 많이 가져야하고, 누군가를 지배해야 한다. 즉 누군가를 아프게 해야 한다. 누군가를 아프게 함으로 자기 행복을 만들어간다. 참 슬픈 행복이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에 거름이니 말이다. 더 많이 불행하게 하면 할수록 더 행복해진다. 이를 위해 적당히 거짓말도 한다. 누군가를 모함하기도 한다. 크거나 작거나 거짓으로 이익을 취하기도 한다. 이 모든 ‘거짓 삶’이 용서 받는 것은 첫 째가 되었기 때문이다.
‘참 삶’은 이렇지 않다. ‘참 삶’은 첫 째가 되기 위해 살지 않는다. 기꺼이 내어준다. 비록 그것으로 아파도 기꺼이 말이다. 자기 있음을 내어줌으로 있는 새로운 희망에게서 오히려 기뻐한다. 나로 인하여 웃는 너의 웃음에서 나의 웃음을 보는 것이다. 내 웃음의 근거를 너의 웃음에서 찾는 것이다. 나 하나의 불편과 아픔과 어려움이 있어도, 기꺼이 너의 희망과 웃음이 되겠다 결심하는 것이 바로 첫째가 되는 길이다. ‘참 삶’ 가운데 첫째가 되는 것이다. 백정의 손을 잡고 한 형제라 소리친 조선 말기 서학과 동학을 보자. 평등을 말하며 그 이유로 기꺼이 죽었다. 수많은 이들이 순교(殉敎)하고 순도(殉道)하였다. 정약종을 보라. 최제우를 보자. 사회의 부조리 가운데 아파하고 힘겨워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나 혼자 양반이니 앞으로 가서 첫째 하겠다 하지 않고, 더불어 나란히 앞으로 걸어갔다. 비록 목숨을 내어 놓았지만, 더불어 있음으로 우리 되어 가는 그 모습, 홀로 첫 째가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첫째가 되는 바로 그 모습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예수는 내어주기 위해 왔다. 그렇게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우리와 더불어 있기 위해 왔다. 더불어 손을 잡고 모두가 하나 되어 앞으로 나아가라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 왔다. 부자가 되어 첫째가 되라 보여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부자가 아니다. 가난한 이다. 그분은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강자도 아니다. 약한 이다. 그렇게 십자가 자기 살아있음을 기꺼이 내어놓은 이다.
더불어 가기 첫째가 되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앞서 가고, 남보다 더 강해지려 하지 말자. 그것은 뜻을 품은 사람도 뜻을 이룬 사람도 아니다. 첫째도 아니다. 남을 이긴 첫째가 되려는 바로 그곳이 지옥이다. 가난해지자. 더불어 가자. 너의 아픔과 가난 그리고 눈물은 남의 것으로 두지 말고 우리 가운데 나의 것으로 두자. 그의 아픔과 가난에서 나의 아픔과 가난을 마주하자. 그는 결코 남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나 아닌 너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자. 더불어 있다. 그리고 더불어 있기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놓다. 나로 인하여 잠시라도 웃을 너의 행복을 위해 말이다.
첫째가 되려거든 누군가의 종이 아니라, 모두의 종이 되자. 누군가의 종은 그의 소유물이 되어 남을 괴롭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친일파와 독재의 부역자와 같이 말이다. 모두의 종이 되자! 나 이외 모든 눈물과 아픔에 종이 되자. 그들의 아픔을 위해 나를 내어놓다. 예수가 그리하셨듯이 말이다. 가난하게 그렇게 모두의 눈물을 위해 살아가는 이에게 힘들지만 행복은 당연한 것이리라 믿는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마태오 복음 5장 3-4절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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