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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3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5.

2019년 9월 3일 저녁 광주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 또한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복음 1장 1-5절)

 

모든 것의 처음엔 ‘뜻’이 있었다. 그 ‘뜻’은 홀로 있지 않다. 더불어 있다. 그것을 ‘뜻’으로 품은 이와 더불어 있다. ‘뜻’이 앞서는 것도 아니고, ‘뜻’을 품은 이가 앞서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있음’은 더불어 있음부터 더불어 있는 것일 뿐이다. 어느 것도 더 앞서 있는 것도 더 뒤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어머니다. 아버지도 아이의 아버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와 함께 있으며, 그 이전에 그 이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품은 순간부터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하나의 우리로 ‘더불어 있음’부터 이들은 있었던 것이다. ‘뜻’과 ‘뜻을 품은 이’도 마찬가지다. ‘뜻’으로 인하여 ‘뜻을 품은 이’가 된다. ‘뜻’과 ‘뜻을 품은 이’가 ‘남’이 아닌 ‘우리’ 가운데 ‘하나’로 ‘더불어 있을’ 때 이 둘은 서로 따로 있지 않은 ‘하나’이며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있음의 근거’가 된다. 도대체 왜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답이 된다. ‘뜻’은 ‘뜻을 품은 이’로 인하여 ‘뜻’이 되고, ‘뜻을 품은 이’는 ‘뜻’으로 인하여 ‘뜻을 품은 이’가 된다.

 

‘뜻을 품는다’는 말은 내 안에 ‘참을 담는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뜻의 회임’(conceptio)이다. 이 회임, 즉 뜻을 품음, 즉 개념이 되어 나의 영혼 안으로 다가왔다는 말은 그냥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무엇인가를 객관화하여 남으로 만들었다는 말 뿐이다.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복음을 남으로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수많은 이들이 성서학을 연구하고 꾸란을 연구하여도 그들은 그곳의 뜻, 그 참됨을 그저 인식의 대상, 즉 나의 남으로 나의 앞에 놓인 인식의 대상, 앎의 대상으로만 알고 그것을 연구한다면, 잠시 그곳의 이야기에 감동되어 마치 삶이 바뀐 듯이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참된 뜻의 회임’은 그 출산이 나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  회임으로 인한 출산이 나의 존재, 즉 현실이 되어야 한다. 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 남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앞에 남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뜻을 품는다’는 말은 그대로 ‘뜻을 품은 이’가 ‘뜻’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이 그대로 ‘뜻을 품은 이’에게 품겨 있어야 한다. 

 

‘더불어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뜻’과 ‘뜻을 품은이’가 ‘남’과 ‘나’로 만남을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너’와 ‘나’로 만나 ‘너’에게 ‘나’를 내어 주어 녹아들고, ‘나’에게 ‘너’가 녹아들어 내어 줌으로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되는 것이다. ‘나’와 ‘너’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뜻의 회임’은 우리로 더불어 있음이란 출산으로 드러나야 한다.      

 

‘홀로 있음’이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참’이라 할 수 없다. ‘그대로의 참’을 보자. 우리에게 흔하게 흔하디 보이는 저기 저 잡초도 그저 ‘홀로 있음’으로 있지 않다. 흙이 그에게 자기 있음을 내어 주었고, 햇빛과 빗물이 기꺼이 자기 있음을 내어주었다. 그뿐인가? 이런 저런 자연의 양분은 또 어떠하고 우연같이 불어오는 바람은 또 어떠한가. 아무 것도 아닌 저기 저 잡초의 몸짓도 우주의 수많은 ‘있음들’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 결과다. 달리 보면, 그 많은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 저기 저 잡초 하나가 된다. 오로지 혼자라는 생각은 버리자. 

 

흙은 흙으로 있음의 근거는 자신이 아닌 이 땅 수많은 생명에게서 본다. 그들에게서 흙은 자신의 참 있음, 그 뜻 있음을 본다. 물 역시 마찬가지다. 물의 참 뜻 있음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있음을 내어준 수많은 생명에게서 본다. 자신의 참 뜻을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인하여 있는 생명에게서 본다. 

 

어쩌면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도 이와 같이 더불어 있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남으로 두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있음의 근거로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그분들의 모습이 이 세상의 본 모습일지 모른다. 아니, 그분이 원하는 세상, 그 뜻이 이루어진 세상은 바로 그러한 세상일 것이다. 홀로 있는 낱개의 여럿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있는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이 세상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그분이 품어 생겼다. 그분의 뜻을 떠나 있는 것도 없으며, 그분의 뜻 밖에서 생긴 것도 없다. 그분에게 남으로 있지 않다. 그분이 품어 있게 되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고 작디작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분이 품은 하나의 뜻으로 삼위일체의 모습처럼 그렇게 서로 더불어 있음으로 있길 원하시고 그렇게 품으시고 낳으셨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자기 있음을 내어주는 모습에 그분도 “그 좋음을 좋았다” 창세기에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은 그분의 창조물에서 그분의 좋음을 마주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가 서로의 웃음에 자기의 웃음의 근거를 보며 웃는 모습에 하느님도 그 둘의 웃음에서 자신의 웃음을 보셨을 것이다. 그렇게 삼위일체, 그 삼위의 ‘더불어 있음’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 모습이며,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자신을 보듯 보셨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남보다 더 좋아지기 원하는 이기심의 마음이 생기면서 에덴동산의 그 웃음은 사라졌다. 더불어 있음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웃음의 근거인 그 웃음, 너의 웃음에서 나의 웃음을 바며 나의 웃음의 근거를 마주하던 그 웃음은 사라지고, 남을 이기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소유의 웃음, 하느님과 같이 강해지고 싶어 하는 강자의 웃음과 하느님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지려는 부자의 웃음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것을 추구하며 살았다. 남을 이기고 소유하며 살아가는 웃음이 세상을 지배할 때, 더 이상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 아니다. 남의 아픔도 남의 기쁨도 보이지 않는다. 이겨야 하는 남이 보일 뿐이다. 자기만 본다. 자기만 생각한다. 남은 이길 사람만 본다. 이긴 사람만 본다. 모든 것이 결국 이기심이다. 남을 너로 보지 못하는 세상, 하느님의 모상으로 우리 가운데 새겨진 그 ‘신성한 시선’이 사라지고 감은 눈에 이 세상은 어둠뿐이다. 그 어둠은 감은 눈 때문이다. 

 

어둠은 깨우치지 못한 이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하고 많은 힘이 없어도 남을 우리 가운데 너로 마주하는 이에게 이 세상은 빛이다. 하느님께서 좋다 하신 그 빛의 세상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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