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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불행하여라!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읽기)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17.

불행하여라!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의 것입니다.” (요한 코리소스토무스, <라자로에 관한 설교> 2,6)

 

교부들에게 ‘소유’와 ‘공유’는 매우 주요한 고민거리입니다. 

‘소유’란 ‘나의 것’이 기본이고, ‘공유’란 ‘우리의 것’이라 말입니다. 소유 중심의 세상에선 나의 것 중심입니다. 나의 것이 더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소리를 치게 됩니다. 행복의 기준도 소유물의 크기입니다. 소유물의 크기가 큰 사람은 무엇인가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더 받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에겐 무엇인가 더 큰 지혜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것 중심의 세상은 항상 다툼으로 가득합니다. 남의 아픔을 거름으로 나의 것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이 주는 행복은 남의 불행을 거름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거짓이 진리로 인하여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진리뿐인 세상엔 거짓이 없지만, 진리가 있기에 거짓이 있습니다. 진리의 공간에서 무엇인자 나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 같으니 쉽게 거짓을 이야기합니다. 알지만 침묵하거나 알지만 거짓을 따르거나 아예 처음부터 거짓을 진리로 알고 살아갑니다. 나의 소유만으로 살고자 하는 이에게 우리의 행복은 왠지 억울합니다 나의 소유를 덜어내야 하니 말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유를 이야기하면 그들에게 거짓 선동자라고 합니다. 독설을 토해 냅니다. 그러나 우리네 사람이란 쉽게 나의 소유 중심으로 생각하기 편합니다. 그러니 그 말이 거짓이지만 진리라 믿어 버립니다. 진리라 믿어 버리면 나의 소유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다툼의 세상이 그냥 그대로 진리이고, 이를 위해 거짓도 위선도 어쩔 수 없는 수단이 됩니다. 과연 하느님이 처음 창조하시고 ‘좋다’하신 세상이 그런 다툼 가득한 세상일까요?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세요.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선의 행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사목규칙> 3,21,45)

 

그레고리우스는 나눔을 있는 것에 있을 것이 있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마땅히 있을 곳에 마땅히 있을 것으로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할 것도 아니고 시혜(施惠)의 행위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의 것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회장의 것도 어느 사장의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보고 좋다 하신 세상은 모든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소유와 공유는 다투지 않고 화해하게 됩니다. 나의 것이지만, 아픔 너에게 기꺼이 내어 놓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의 것이 주는 행복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진 것도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를 가지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이 세상에 빛이 되기보다는 나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한 것이 더 솔직한 이유인 것을 우리는 흔하게 됩니다. 거짓을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소유를 지키고 나의 소유를 더 크게 하기 위합니다. 너무나 달콤하니 말입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미친 탐욕을 어디까지 뻗치렵니까? 너희들만 이 땅 가운데 살려하는가? 왜 그대들과 같은 본성을 지난 사람들을 쫒아냅니까? 왜 자연을 그대들만의 소유라고 내세웁니까? 땅은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이가 함께 사용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대 부자들은 그대들만의 권리를 사칭합니까? 자연은 모든 인간을 가난하게 낳은 까닭에 부자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옷도 걸치지 않고, 금과 은도 지니지 않은 채 태어납니다.”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2)

 

우리의 본질은 가난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난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태어난 것이 자연적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가난으로 태어나 가난으로 돌아갑니다. 100년을 살아도 36500일을 사는 존재입니다. 우주의 시간에선 찰나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서로 아프게 합니다. 나의 소유를 위해 거짓을 말합니다. 없는 것도 진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나의 소유에 대한 침착입니다. 

 

나의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 같지만, 그것이 종살이입니다. 나의 소유가 나의 행복의 주인공이니, 결국 나의 행복이란 나의 마음이 아닌 나의 소유에 종속된 것일 뿐이니 말입니다. 소유물에 종속되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다투게 조종되는 것이 우리네 처지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일까요? 우리가 진리로 인해 자유를 누릴 때, 누릴 그 자유는 이런 것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나의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암브로시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원래 모습, 그 모습은 가난이다. 그 가난은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힘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린 온전히 하느님과 더불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소유로 이기며 살아가려 할 때, 우린 누군가의 아픔에 있어 나쁜 그 무엇이 됩니다. 악마가 됩니다. 

 

“소유한 모든 것을 무덤 안에 채워 넣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나 부유한 사람에게나  한 자락 풀밭으로도 넉넉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부자의 욕심으로 다 채워 주지 못했던 땅은 이제야 부자를 통째로 집어삼킵니다. 자연은 우리가 언제 나고 언제 죽든지 차별할 줄 모릅니다. 우리를 모두 동등하게 창조하고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무덤의 품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누가 죽은 이들의 신분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그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땅을 파서 부자를 식별해 보십시오.”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2)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지려 그렇게 서로들 싸웁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땅을 가지고 싶어 환장을 하지만, 결국 흙이 되어 삼켜지고 지워져 갑니다. 그것이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가난으로 태어나 가난으로 돌아갑니다. 사라지지 않는 혼, 그 혼에 집중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할 때, 이 삶은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질 것으로 두고 치열하게 나쁜 존재가 되어가다 사라지는 슬픈 과정일 뿐입니다. 

 

대중가요 가운데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한글도 한자도 아닌 산스크리트어 제목을 다진 가요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타(तथाता, tathātā)’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란 의미입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타타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어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과연 나의 소유물은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까요? 참된 행복은 나의 소유물에서 오는 것일까요? 100년을 살아도 36500일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대부분을 나의 소유물을 위하여 다투고 싸우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일까요? 초대 교회에서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소유가 아닌 나눔이었습니다. 그 나눔의 방식이 때론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정어도 소유로 행복을 가르치기 보다는 공유와 나눔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땅의 가치가 하늘에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늘의 뜻이 아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노력한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타타타,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가난입니다. 버림의 가난이 아닌 공유의 가난입니다. 홀로 웃는 소유의 행복이 아니라 더불어 웃는 공유의 행복입니다. 

 

“부자의 몸을 칭칭 감은 비단옷과 금실로 짠 두건은 살아있는 이에게는 해롭고, 죽은 이에게는 무익합니다.”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2)

 

자랑삼아 걸치는 것이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누군가에겐 행복이 됩니다. 누군가에겐 폭력이 되고 누군가에게 즐김이 됩니다. 이 부조리의 공간, 그 가운데 나를 드러내는 사치품들은 가난하고 힘든 이에게 해롭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아프기도 하고, 그것으로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것이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죽은 이에겐 그저 무익할 뿐입니다. 아무 필요 없습니다. 관에 아무리 소중한 것을 묻어도 가난하고 힘든 이에게 혹은 정말 필요한 이에게 주는 것만큼 소중하지 않습니다. 관에 들어간 모든 보이는 것들은 그대로 모두 흙이 될 뿐입니다. 

 

욕심이 사로잡힌 이들은 나의 소유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다툼의 원인이 되는 이들입니다. 불행을 만드는 이들입니다. 썩어 사라질 것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이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부자여! 그대는 향유를 바르지만 악취를 풍깁니다.”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2)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소유에 빠진 이들, 결국 악취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일 뿐입니다.

 

 

 

2019년 서재성당에 있던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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