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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유대칠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1 (일간유대칠 17호 2020.02.19)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2. 19.

<대한민국철학사>는 내가 다른 이와 다르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책이다. 혹은 내가 다른 이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책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 시작한 책은 아니다. 그렇게 심각한 시대적 사명감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 시작은 지금 내가 읽은 철학사가 나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로도 아니, 감동도, 그렇다고 어떤 유익도 없이, 거의 유일한 유익은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 정도다. 그러나 그런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나에게 철학사는 철학함이다.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고, 결국 그 반성적 사유 속에서 나는 온전한 내가 될 것이다. 반성이란 것은 결국 돌아봄, 회상이며, 그 회상 속에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회상 가운데 항상 나의 머리를 지나치지 않는 것은 것은 바로 나와 함께 있던 그 수많은 '더불어 있음'들이다. 그들은 나에게 감옥도 아니며, 나의 주체성에 도전하는 어떤 것도 아닌 온전한 나의 주체성을 일구는 나의 소중한 존재의 조각이었다. 나의 벗들과 나의 식구들 그리고 심지어 기억나지도 않은 수많은 조각들이 지금의 나를 일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나의 단일한 무색의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더불어 있음의 터다. 나의 반성, 나의 돌아봄은 나 하나의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가운데 나, 나와 더불어 있는 그 우리 가운데 나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의 철학, 그 온전한 나의 철학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우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니, 그 우리란 결국 우리 가운네 나 아닌 너의 눈물이 남의 눈물이 되지 않을때였다. 그 가운데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인가? 아직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노력도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의 아픔을 두고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으며, 때론 조롱을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린 우리가 아니다. 최근 세월호의 아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으로 누군가는 우리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또 동시에 아직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한국이란 국가 가운데 있음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즉, 아직 한국은 온전히 우리가 아니다. 법적으로 한국사람이라 해도, 나와 우리가 아닌 이들이 많다. 

우리... 그 고민은 우리 철학은 우리 고난 앞에서 우리 말과 우리 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과거 페트루스 라무스(Petrus Ramus) 혹은 피에르 드 라뮈(Pierre de la Ramee)는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철학을 시도하였다. 당시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시대 아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아픔은 라틴어로 담겨 질 수 없었다. 라틴어는 가진 자의 자기 정체성의 언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자의 밖,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에게 라틴어는 멀기만 했다. 그러니 그는 프랑스어로 철학을 시도한 것이다. 루터는 독일어, 즉 민중의 언어로 성서를 번역했다. 민중이 울고 웃는 그 언어로 하느님을 마주하게 한 것이다. 피에르 드 라뮈 역시 철학과 논리학에서 바로 그러한 일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선 어떠했는가? 불교도 유교도 민중의 언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땅 백정을 비록한 많은 이들에게 철학, 즉 자기 돌아봄은 허락되지 않았다. 한문으로 양반만이 중국의 밖에서 중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철학을 일구어갔고, 불교는 사람 내면 보편적 아픔에 대하여 궁리하면서 막상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힘을 드러내지 못했고, 민중의 언어로 민중에게 다가가기 보다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문 같은 염불로 기복 신앙과 같은 모양새로 마음을 달래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 민중은 한문으로 분노하지 않는다. 유교는 이유도 근거도 모르는 가운데 그저 보이는 우리 삶을 지배했고, 불교 역시 이유도 근거로 제대로 우리 민중에게 궁리하게 하지 못하고 염불에 머물렀다. 훗날 내가 이 땅의 불교'들'을 정리하면서 아마 이에 관한 문제를 다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땅 민중에게 이 땅 민중의 언어로 다가가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 그 첫 순간은 우리말로 쓰인 신학 서적인 정약종의 <주교요지>다. 서학의 내용을 담은 당시 한글 서적들은 민중들에게 그들의 말과 글로 그들의 처지를 돌아보게 하였다. 이후 동학 최제우의 <용담유사>는 이제 이 땅 아픔에 대하여 이 땅 민중의 오랜 고민 속에 만들어진 하나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남에게 약을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심이 되어 스스로의 언어로 스스로를 돌아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서학의 순간을 한국철학의 회임으로 보며, 동학의 순간을 한국철학의 출산으로 본다.

이러한 출산은 3.1혁명으로 이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졌다. 그렇게 민중이 이땅 역사에서 통치의 대상에서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은 시작되었고, 대한민국철학은 바로 그 대한민국철학이란 조건 속에서 가능한 철학이다. 

P. 110  
말은 따로따로 있던 이들을 하나로 만들고 글은 말에 발을 달아 더 멀리 떨어진 이들도 다 같이 하나가 되게 한다. 결국 한국말과 한글이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민중은 ‘나’의 삶 속 ‘나’의 고난 앞에서 ‘나’의 생각을 ‘나’의 말과 글로 담아내면서 드디어 ‘나’의 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서서히 민중은 자기 자신의 철학적 고향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바로 ‘철학의 회임’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철학도 조선철학도 아닌 대한민국철학, 그 철학을 돌아본 것은 지금 우리의 철학, 그 철학 가운데 나와 너가 남이 아닌 우리가 될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4월 16일은 세월호 비극의 날이며, 내 아들의 생일이다. 내 아들의 생각을 보내며 뉴스로 세월호의 비극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그 '우리'를 말이다. 

유대칠 씀

(아마 생각 없이 그냥 막 적었다. 그냥... ㅎㅎ 내가 원래 그렇게 치밀하지 않다. ㅎㅎ 부디 대한민국철학사를 많이 읽어주면 좋겠다.)

통영에서...

http://aladin.kr/p/BW2W9

 

대한민국 철학사

이 땅에서 우리말, 우리글로 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우리의 삶과 고난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한국철학이다. 위계의 사회였던 조선을 제대로 뒷받침해준 성리학과 이후 사민평등 사상을 가진 양명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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