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참 불쌍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두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을 가진 친구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작은 식당을 하는 친구의 어머니는 학자가 되고 싶던 친구는 직업 학원에 보냈다. 말은 스스로의 선택이라지만, 1998년 IMF의 상황에서 이미 오래 전 부터 다른 여인과 사는 아버지와 이미 오래 전 부터 아들만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어머니 사이에서 친구는 대학이 아닌 직장을 선택했다. 분명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강제성에서 말이다. 친구는 성실했다. 직장을 다니며 방송대를 다녔다.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는 남동생에게서 찾으려 할 것일지 모르겠다. 조금은 사태한 삶을 사는 남동생을 위해 어머니는 희생을 했고, 그 희생의 크기가 클 수록 친구의 희생도 동시에 커졌다. 그것이 싫어 둘째 여동생은 가족의 동의도 없이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그곳 사람을 만난 그곳의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로 10여년 그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 단 한번 그를 만났다. 그에게 어머니는 자신을 괴롭히며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그냥 남이었다. 세째 여동생은 어머에게 가장 많은 것을 희생했기에 어머니와 몸만 다를 뿐 사실 어머니의 분신이 되었다.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에 과도한 분노를 드러냈다. 40살이 되도록 그는 여전히 분리 장애 속에서 심각한 정신병적 어려움이 있지만, 치료도 어머니와의 과도한 집착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 역시 그를 그냥 그렇게 옆에 두고 산다. 친구의 부탁으로 세째 여동생에게 평소 알던 한 친구를 소개시켜준 일이 있었다. 나름 애교있는 말투에 참 좋아했지만, 곧 극심한 집착에 도망치든 그에게서 떠난 일이 있다. 그를 소개시켜준 나에게 심한 욕을 하면서 말이다. 친구는 이 모든 부조리를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원인과 결과에 살아있지만 남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과도한 남동생에 대한 집착과 여동생 그리고 자신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역시 어머니는 그저 불쌍했다. 그러니 결혼도 없이 그냥 어머니의 편에서 어머니 외롭지 않게 살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친구와 셋째 동생은 그렇게 자신을 포기했고, 나에게 작은 오토바이를 자랑하며 자기 개성을 과시하던 둘째는 그러지 못해 미국행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남동생은 자신에게 과도한 집착의 어머니가 힘겨웠다. 그런 중 친구가 죽었다. 장례식은 친구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용히 아는 이 없이 치루어졌다. 나 역시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지났다. 몇 년. 그 사이 남동생은 결혼을 했다. 세째는 여전히 친구의 어머니와 살고 있고, 둘째는 여전히 한국에 오지 않는다. 아버지에 이어서 둘때가 그 가족을 남으로 선언했다. 친구의 재산과 보험금은 남동생의 결혼 비용이 되었다. 집이 되고 차가 되었다. 친구 어머니의 뜻이었다. 친구 어머니는 아들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며, 세째와 따로 산다. 세째와 같은 좋은 딸을 두어 행복하다면서 말이다.
친구가 죽고 처음 나는 슬펐고 다음은 분노했으며 지금은 슬프다. 친구를 기억하는 이는 누구일까? 결혼식 이전 남편의 누나였던 이, 본 적도 없는 이의 노력으로 자신이 지금 그 집에 살고 있으며, 자신이 그 차를 타고 있다며 남동생의 아내는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남동생에게 큰 누나는 또 어떤 존재일까? 여전히 쉼 없이 조심스럽게 간섭하는 어머니가 성가시다는 그의 말에서 어미나가 그에게 어떤 존재일지 알것 같다. 여전히 밖에 있는 노년의 법적 아버지는 정말 아버지일까.
정도의 차이지만, 어쩌면 방식의 차이지만, 우리네 일상 속 볼 수 있는 온전히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이야기다. 세째는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슬플지 모른다. 이미 그는 자신의 삶보다 어머니의 삶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었기에 말이다. 어머니가 그에겐 자신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의 본질은 사라져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있기는 한 것일까. 둘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남만이다. 둘째 여동생과 네째 남동생은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는 남이었고, 이젠 볼 일이 없으니 더 마음을 멀어졌을지 모르겠다.
이들에게 가정은 무엇일까? 의무보다 책임보다 이 세상 이런 저런 힘겨움보다 더 뜨겁게 서로를 안아주는 우리됨, 그 우리됨이 바로 가정이 아닐까. 남보다 못한 우리가 가정일 순 없다. 한 번도 따스함을 배워본 적이 없다는 친구는 그렇게 외롭게 따스함 한번 느껴보지 못하고 죽었다. 친구의 죽음. 4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친구와의 마지막 약속이던 커피 한 잔과 잡뽕 한 그릇이 그저 미안하다.
그리고 여전히 정도와 방식의 차이일 뿐, 많은 우리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불쌍하다.
2020.04.08.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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