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 한 것들이 있다. 무슨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그냥 일상 속 소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그 일상 속 소소한 것으로 살아간다. 나는 거대한 논리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 나의 삶은 일상 속 소소함의 연속이다. 그러니 나의 다짐도 그러한 일상 속 소소한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절대 누군가를 놀리지 않는다.
나의 대짐이다. 놀리지 않는다. 어떤 것으로든 놀리지 않는다. 대화 중 그의 말투, 취향, 외모, 능력 등등 어떤 것으로든 놀리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나를 놀리는 것이다. 나를 정말 잘 아는 이들은 그래서 나를 놀리지 않는다. 어쩌면 조금 진지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름 나의 방식으로 웃긴 편이란 말도 듣는다. 놀리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설령 재미난 이야기가 필요하다 해도 누군가를 놀리며 이야기하진 않아야 한다. 그것은 폭력이다. 나의 재미를 위해, 한번 재미나게 웃기 위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언어 폭력을 행사하는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그냥 나쁜 이들의 나쁜 습성일 뿐이다.
누가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든 내가 놀릴 문제는 아니다. 그가 간장에 초코렛을 놓어 밥과 먹느다 해도 그것은 그와 나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으로 그를 놀릴 자격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런 자격은 없다. 놀림 속에서 사람을 한 없이 작아진다. 특히 친하고 가까운 사라일 수록 놀리면 안 된다. 그에겐 치유하기 힘든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단식하며 목메어 울었더니, 그것이 도리어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시편 69.10)
진실함을 위하여 애쓴 이들이 형제자매에게 남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놀림거리가 되곤한다. 그러니 그는 다음엔 진실함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 누군가는 "니가 그렇게 잘 났나"라고 비아냥하며 조롱해버리고, 심지어 그렇게 "그렇게 잘 난 놈이 돈도 못 벌고"라며 앞뒤 논리도 아닌 이야기로 놀린다. 그때 막상 믿었던 벗들은 혹시나 그 놀림이 자신을 향할까 한걸음 뒤로 몰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철저하게 홀로 됨을 느끼게 된다. 잔혹한 폭력이다.
국민학교 시절, 한 친구의 어머니는 수 차례 여러 사람과 바람이 나서 도주를 하였다. 수례를 끌고 다니며 그릇 등을 팔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 대하여 오면 오고 말면 말라는 식으로 살았다. 11살 어린 나이에 그 친구는 동생을 매일 씻기고 저녁을 먹여야했으며, 방 청소를 해야했고, 연탄을 갈아야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칭찬 보다는 항상 화를 냈다. 걸레질은 무엇이 잘못이고, 저녁 식사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친구는 바람 난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들을 돌보는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제법 많은 부당한 분노를 다 받아드렸다. 밖에서 보면 그렇게 단단해 보였지만, 사실 속은 엉망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나와 그 친구는 학원에서 만났다. 무지하게 무서운 선생이 주판으로 머리르 사정 없이 때리는 그런 학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와 나는 같은 시간에 수업을 들었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아이를 그렇게 가까이 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그 아이의 어머니에 대하여 하던 심한 조롱과 멸시가 아무 죄도 없는 그 바람난 어머니의 딸인 친구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일 평생 처음 들은 여자를 두고 '걸레'라고 부르던 말은 그 때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어린 유대칠의 방식으로 응징을 당했다. 그 친구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냥 불쌍해서도 아니다. 나 역시 놀림이 싫듯이 그렇게 은근히 쉼 없이 놀림을 받고 집에 가선 아버지의 분노 대상이 되는 그 친구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서글픈 현실이라고 해야할까. 그 친구는 전학을 갔다. 그 이후 그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그 친구의 주변 이런 저런 일로 그 친구를 놀리던 이들은 그 놀림의 순간, 그 놀림의 쾌감을 공유한다. 한 아이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까.
그 아이를 놀리던 이들은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일상의 수많은 작은 조각의 하나일 뿐이니 말이다. 그 조각들이 돌이 되어 그를 향했다. 그에겐 어쩌면 이제 30년이 지난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아픈 자신의 모습일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 놀리지 말자. 무엇이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놀리지 말자. 무엇이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 일상의 많은 말들이 그렇게 폭력적이다. 힘들게 목메어 울었더니 그것조차 놀림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나부터라도 절대 놀리지 말아야겠다.
절대.
유대칠 20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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