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점쟁이의 자식들아! 간통하는 남자와 매춘부의 종자야 이리 오너라! (이사 57.3)
너희는 영매들과 점쟁이들에게 가지 마라. 너희가 그들을 찾아다녀 그들이 너희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31)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 가운데에 있는 예언자들과 점쟁이들이 너희를 속이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너희가 꾼 꿈을 풀이하려고 하지 마라. (예레 29,8)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1사무 15,23)
요즘 이상한 종교들이 점점 힘을 가집니다. 이상한 종교라고 제가 부르는 것은 '이기심의 종교'이고, 또 '미래를 예견해 준다'는 이상한 행위입니다. 이들 종교인들은 때론 자신을 종교라 아니 합니다. 그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학문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에서 부터 오랜 시간 이어준 지식 혹은 학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 내려왔다고 학문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한 달콤하지만 해결은 없는 마약이었을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당을 다니는 분들 가운데도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며 혹은 학문이라 합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입에 소금물을 뿌리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물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웃기지면, 사실 이들의 논리도 그 정도의 웃긴 이야기입니다. 정말 학문이라면 그 학문적인 진리의 근거, 즉 토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것이 참인지 왜 그것이 거짓인지 합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학 철학의 엄밀한 기준을 따라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과학철학도 그러한 것을 학문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그것으로 사람을 고친다고 광고한다는 것이 그것을 학문이란 말은 아닙니다. 모두가 공인할 수 있는 학문적 기준을 통과해야합니다. 그냥 그것이 학문이라고 고집한다고 학문은 아닙니다.
요즘 대학은 돈이 되면 모든 것이든 학문으로 부르던데 심지어 이런 점치는 것도 학문이라 부르더군요. 그러면서 교양과정에서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학문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돈이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학문이라 할 순 없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신 주역 전공 교수님들도 그리고 중국 사상사의 교수님들도 들으시면 웃으실 일입니다.
이것은 종교성을 가진 사이지 지식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이라면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미래가 불안하지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오랜 시간 우리 사회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질서가 부족하니 미래에 대하여 더욱 더 불안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하여 보다 안정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강박증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강박 속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편하지요. 미래도 남도 모두 자신의 점쾌에 나온 대로 있다고 믿으면 이 세상은 그저 자신의 머리 속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 세상이 그 글귀 속에 구속되어 존재하고 있을까요? 누구는 무슨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기에 이런 저런 직업을 가지게 되고, 이런 저런 불운을 경험하고 앞으로 이렇게 살게 된다는 그 글에 한 사람의 존재는 구속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결국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생각 없니 나약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점술은 마치 이 세상을 내려다 보는 하나의 기술 처럼 그를 착각하게 합니다.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는 어둠 속에 있어서 희망입니다. 나의 지금 노력으로 만들어가야 할 백지이기에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공간을 방해하는 사회가 부조리하기에 그것과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적은 희망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 노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이지, 나의 점쾌가 어떠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의 미래와 누군가의 미래를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개인에 대한 무시이고 신에 대한 도전입니다. 믿지 마세요. 그것은 학문도 아니고, 우리의 삶은 그렇게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미래를 알려주지 않으시는 것, 우리에게 이성을 주시고,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무엇임을 결정할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에 대하여 책임을 지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건으로 합니다. 그 불안을 이기기 위해 사이비 지식에 의존하거나 이상한 종교에 빠지기 보다는 지금 스스로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응원과 스스로의 고민 그리고 애씀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속지 마세요. 특히 그리스도교인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그와 같은 것을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믿지 마세요. 그냥 취미로 혹은 심심풀이로 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절대 믿지 마세요. 꿈도 그런 이들에게 찾아가 풀이하지 마세요. 객관적 사실을 들으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느님의 응원과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바람피지 마세요. ㅎㅎ 그 시간에 스스로의 삶, 힘든 삶이지만 더불어 웃어주고 손 잡아주는 가족, 스스로의 노력 그리고 고민에 집중해보세요. 노력도 고민도 없이, 주어진 복에 대한 고마움도 없이, 하느님의 그 큰 은혜에 대한 고마움도 없이 글 몇 줄과 스스로 무당도 점쟁이도 아니라며 미래를 함부로 말하는 거짓 무당 혹은 점쟁이의 그 말에 흔들리지 마세요.
ㅎㅎ
알 수 없는 미래, 너무 불안해마세요. 알 수 없는 미래이기에 희망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 우리의 자유로 만들어가야할 그 미래, 그 미래에 대하여 책임 있는 노력으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하느님에게 당당한 지금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유대칠 202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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