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나'로 있을 수 있는 터가 '우리'라는 전체 안이다. 양심도 홀오 있는 나에게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전체 가운데 '너'와 더불어 있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철학사> 25쪽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골목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온전히 사라졌다. 재개발이라지만 원래 있던 곳이 더 좋아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이 생겼다. 그리고 그곳은 더 이상 내 어린 시절의 공간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오락을 하던 호돌이 오락실은 아예 사라졌다. 나는 오락실을 가지 못했다. 용돈이란 것이 없으니 오락실을 갈 수 없었다. 그냥 친구들이 그곳에 가는 시간,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운동회 날 나와 어머니가 함께 식사를 한 적은 단 한 번이다. 6학년이지 싶다. 그때 주변 중국집이 모두 사람들로 가득해서 어쩔 수 없이 갔던 수성식당도 사라졌다. 그곳의 비빔밥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 맛 없는 집이었던 것 같았지만 그 비빕밥보다 어머니가 함께 한 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나를 좋아하던 제법 튼 식육식당 집 첫쨰 딸은 나에게 자기 집에 와서 같이 놀고 고기 먹고 가라 했는데 나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내 생의 20여년은 그곳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뚱뚱하고 느리지만 무척 착했던 동네 동생... 그 아이의 어머니는 바람이 났다 했다. 그 친구와 무척이나 수줍음이 많던 아저씨가 단칸 방에 살았다. 나름 기죽지 말라도 없는 형편에 아이에게 용돈을 제법 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것을 사 먹었다. 나는 꾀돌이와 오란다를 먹었다. 그 친구는 당시 제법 유명한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 처럼 시장에서 천원 주고 난 T셔츠를 입고 다닌 친구가 신발만 눈에 띄었다. 물 날리는 상의와 쉬지 않고 입은 학교 체육복 그리고 비싼 운동화... 아마 그의 아버지가 기죽지 말라 사준 듯 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 운동화가 참 부러웠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 친구는 2-3년 정도의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세 식구가 와서 둘이 되었으니 아픈 기억의 대구겠다 싶다. 이런 저런 이야기는 동네 아주머님의 입에서 퍼져갔다. 그 입을 향한 귀는 각 집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다시 독한 입으로 들은 이야기를 확대하고 다녔다. 사실 그래도 나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고 정말 아무 상관 없이 그와 놀았다. 아주머니는 모이면 남 이야기를 했다. 아니면 누군가는 자랑을 했다. 아저씨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한국전력 직원이라 하고, 누군가는 한국방송 직원이라 하고, 누군가는 어느 공장... 누군가는 누군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막상 내가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아저씨는 거의 없다.
우리 가족이 전세로 살던 집 바로 옆은 교회였다. 지금도 시끄럽다면서 공사장 인부 아저씨를 향하여 개새끼 소새끼... 욕을 하던 목사가 생각난다. 나는 그 집 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좋지 않았다. 사실 욕하는 목사... 하지만 막상 자신들은 예배 시간 주변에 상당한 잡음을 전함을 모르던 그가 한 몫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신기하게 그 교회를 다니는 다른 이웃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같이 예배 하고 있더나 그 교회의 잡음이 우리의 소리로 다가와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친구들은 지금 연락이 되지 않는다. 사실 개인적으로 너무 힘든 시절이라 돌아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떄 그곳에서 내가 만들어진 것 같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선교원시절부터 6학년까지 다닌 교회만이 내가 평화를 누리던 곳이다. 단 한 번도 초등부가 10명을 넘지 않았고, 대부분 5-6명이었다. 아주 아주 작았다. 교회는 2층이고, 나는 지금은 술집이 되어 아직도 그 마을 한 곳에 남아있는 그곳을 가장 좋아했다. 교회는 따로 화장실이 없었다. 1층은 룸이었다. 검은 공간에 만취의 아저씨들과 누나들이 이런 저런 욕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는 곳... 교회는 1층 그 룸과 화장실을 같이 사용했다. 그리고 그 룸 사장 아들은 공부를 제법 잘했고 자랑이 심했으며 제법 좋은 학원을 다녔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은 화장을 긴하게 한 그 사장은 아들이 마을 아이들과 노는 것을 싫어했다. 내가 가장 평화를 누린 바로 그곳도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곳이다. 마당이 없어서 교회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1-2분이가 갈 수 있는 바로 옆 성당으로 가서 그곳 마당에서 놀았다. 그리고 화장실은 교회 1층 룸 화장실을 갔고, 종종 누나들과 마주치면 나에게 야쿠르트를 주곤 했다. 신문배달을 할 때 개인적으로 나는 그곳에 배달할 떄를 좋아했다. 들어가면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수박 화채랑 야쿠르트 그리고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고 다른 집 배달을 위해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누나들은 제법 친절했다.
가만이 보면 참 신기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참 재미나게 지냈다. 신천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마을 땅 구석에 농사를 짓겠다고 제법 크게 고추와 상추 등등등을 심었고 나중엔 어머님이 재배하셔서 우리집 반찬으로 사용하였다. 그 마을에서도 무척 가난한 편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다. 동생의 말 처럼 웃기고 이상한 이들 가득한데 나쁘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마을이 완전히 재개발 되면서 이젠 온전히 기억만 남았다.
나에게 우리로 남은 시간이다. 나를 이룬 시간이다. 고상한 것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곳이 내 존재의 거름이 된 곳이 아니었나 싶다. 시골로 내려간 친구는 지금 어찌 지낼까... 30년... 지난 지금 괜히 궁금하다.
사진 속 노란 바지가 유대칠이다.
유대칠 씀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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