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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유대칠

나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있다. (일간유대칠 2020.05.02)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5. 2.

작년이다. 더운 여름이다. 광주에서 중세철학 강의를 마치고 늦은 밤, 심야 버스를 타고 대구로 오던 길이다. 그 주간도 그 전 주간도 나는 심한 두통으로 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잠시라도 두통을 잊기 위해 커피를 쉼 없이 마시며 주머니엔 진통제를 항시 들고 다녔다. 입을 열기가 힘들 정도로 두통은 심했다. 하지만 나는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할 때, 듣는 이에게 나의 아픔으로 성가심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소신이 있다. 과거 시간 강사 시절에도 강의가 마칠 때까지 4시간을 한 자리에서 한 걸음도 걷지 않고 앉지도 않고 강의 한 적이 있다. 심어 허리 통증과 발목 통증으로 이대로 앉으며 읽어날 수 없고 한 걸음도 앞으로 걸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 여학생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왔었다. 작은 포스티잇에는 “교수님 힘내세요”라는 글이 있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아픔도 잊을 정도였다. 광주에서도 그랬다. 중간 쉬는 시간에 어떤 분은 커피를 그리고 어떤 분은 녹차를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잘 기억나지 않는 차를 가져와 나의 자리에 두고 가셨다. 글귀는 없었지만, 힘든 내 모습이 보였나 싶어 미안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고마웠다. 사실 보통의 시민분들이 나 처럼 재미없는 사람에게 거의 20주간 중세철학 심화 과정 강의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를 같이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든 일이 분명하겠지만, 그렇게 함께 해주고 내가 힘들고 아파 보이면 그렇게 응원해주셨다. 얼마나 고맙고 기운이 나던지 모르겠다.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 잠이 들기 힘들 정도로 아팠지만, 그 생각에 나름 상당히 구름에 오른 신선 모양으로 웃고 있던 기억이 있다. 커피와 녹차 그리고 어느 찬 한 잔… 

가만히 생각하면, 나는 남들에게 더 큰 응원을 받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들의 응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간혹 너무 고마워 그분들 한 분 한 분을 생각하면 새벽 시간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오랜 시간 나를 봐온 많은 이들은 나를 응원하지 않는다. 

처음 책이 나왔다면 너무 기쁜 마음에 힘겹게 연락해 나의 책을 들어 보이면 차가운 자본가의 어투로 답했다. “얼마 벌었냐?” “교수되냐?” “진중권이나 강신주 되는거가?” 나의 답은 “아니” “아니” “아니”였다. 그러면 묻는다. 그러면 왜 하는데… 그때 나는 생각했다. 다음 책이 나오면 들고 오지 말아야겠다. 

내가 서울에 광주에 대구에 강의를 하러 다니던 시절, 기쁜 마음에 알리면, 반응은 비슷했다. “열심히 잘 준비해라”는 말보다 결국은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마쳤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쓸데 없는 일을 하는데 시간을 쓰며 지내는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응원의 말이 참으로 그립다. 지금도 그렇다. 

몇 일 전 두 명의 사람과 아주 우연히 마주하고 커피 한 잔을 나누었다. 한 명은 별로 달라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게 나는 철들지 않은 사람, 쓸데 없는 것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돈을 받고 그 일을 할 것이면, 자기가 소개하는 곳에 가서 일 배우고 돈 벌면 금방 한 달에 그 돈보다 더 많은 것을 벌 것이라며 나를 위로하는 듯이 결국은 자기 자랑을 했다. 나는 이제 이 정도엔 담담하다는 듯이 그냥 듣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요즘 참 심심하다 했다. 인간들이란 것은 서로 사정이 이용하고 버리고 하는 것들이니, 다 제외하고 이젠 누나들인데. 요즘은 누나들이랑도 돈싸움 중인가 싶었다. 물려준 것이 겨우 아파트 하나라는 데, 그 하나도 그들 사이엔 오랜 서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기회가 된 모양이었다. 2-3년 만에 만나 누군가의 불편한 가정사와 전혀 응원이 되지 않는 자기 자랑을 듣고 나서, 그냥 그가 불쌍했다. 나가는 길에 뭐 더 먹으라며 나에게 작은 쿠키 하나를 더 사주고 사라진 그, 하지만 다시 만날 일은 없을 듯 싶다. 이런 우연이 아니면 말이다. 그는 항상 외롭고 자기를 남들이 무시하고 있다고 했지만, 내가 느끼는 그는 항상 누군가를 외롭게 하고 누군가를 무시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제법 많이 달라져있었다. 여유가 있었다. 입에 달고 있던 누군가에 대한 조롱도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은 그가 사는 공간에 대한 실망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조롱과 멸시였다. 그런데 사실 그 자신이 그 가운데 가장 힘겨운 사람으로 나에게 보였다. 쉽 없이 누군가의 출신 학교에 민감했다. 스스로는 절대 아니라 했지만, 나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신랑을 이해하고 기억할 때 그가 국민대를 졸업한 사람 혹은 연세대를 졸업한 사람 등등으로 기억했다. 그에게 나는 지방대였다. 그는 아니라 했지만, 누가 보아도 그의 그런 모습은 조금 심하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는 지방의 어느 전문대 출신이었다. 그것이 싫어 방송대를 갔지만, 그 역시 졸업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달라져있었다. 책을 낸 나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응원의 말을 했다. 정말 그가 내가 잘 된다고 무엇이 좋아지겠는가. 그러나 그는 쉼 없이 나를 응원하고 축하해줬다. 10여분의 시간이지만, 마음 깊이 그가 남았다. 4-5년만에 만난 누군가와의 10여분의 만남으로도 충분한 응원과 축복을 준 것이다. 

너무나 고맙고 고마웠다. 

아직도 나는 나를 향한 조롱과 멸시에 더 익숙하다. 

그 조롱과 멸시도 나의 한 조각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대부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강사 유대칠에게 커피를 건낸 학생의 그 커피와 잘 걷지 못하는 나를 버스까지 부축해준 어느 힙합 소녀의 친절, 그리고 두통으로 힘든 나에게 커피와 녹차 그리고 차 한 잔을 들고와준 그 마음, 무엇보다 나를 미래를 두고 응원해준 몇몇 선생님들의 응원,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해주신 몇몇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목사님의 마음… 응원의 글을 적은 종이 혹은 자신의 작은 종이 접기 작품을 책상에 두고 가는 딸의 사랑...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전히 의도하지 않는 일상 속 조롱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나의 주변에 가득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도 참 불쌍하다 싶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들 하나 하나도 그 조롱의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광주에서 대구 오는 버스 안에서, 아파 죽을 듯 한데, 웃으며 있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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