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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존재론 강의1 (2020.05.18)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5. 18.

영어로 be 동사는 '있다'의 의미를 가지지만 동시에 '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이 하나의 단어 속에 녹아들어가있다. 그리고 품사도 동사다. 그러나 한국말은 그렇지 않다. '있다'는 실존의 여부에 대한 형용사이고, '이다'는 서술격 조사다. 이 둘을 하나의 단어로 묶어 낼 수 없다. 한국말이 그렇다. 지중해 사람들이 그 be 동사와 관련된 고민을 두고 ontology라고 한다. 우리는 이를 존재론이라 옮겨 읽는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실존만을 의미하지 지중해 사람들의 말 처럼 '이다'와 '있다'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어말으로 생각하면 한국어는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사유를 언어적으로 온전히 그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다. 한국말 어디에서 있다와 이다가 하나의 단어로 묶여있지 않으며, 항상 다르다. 그렇기에 중세 지중해 사람들이 오랜 고민을 이어온 '이다'와 '있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하나의 단어에 묶여있을 때, 이 둘을 실재적으로 구분되어 있는지 아니면 생각으로만 구분된 것이지에 대한 논의가 한국말엔 없다. 원래 나누어져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존재론적 사유가 우리 언어에 없다고 무익하고 우리에게 어떤 유익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 역시 참으로 있는 것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고, 오히려 언어적 문제들이 이미 나누어져있기에 조금 더 다른 차원에서 한국말로 된 존재론을 구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있다'는 말을 생각해 보자.

'있는 것'은 항상 '무엇'으로 있다. 어떤 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하나도 없다면, 우린 그것의 있음도 알아차라지 못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이름과 용도는 몰라도 최소한 '이것'이란 무엇이라도 있어야 그것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임을 알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 밖에 실존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불사조'를 보자. 그것의 무엇임은 알지만 그것이 '비둘기'와 같은 차원은 아니다. '비둘기'는 무엇인지 알고, 그 무엇임의 근원이 나의 밖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비둘기의 있음임을 안다. 그러나 불사조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는 나는 분명이 '온전히 무엇으로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번 정리해보자.

있음의 여부에서 보면, '온전히 있음'과 '아예 없음'으로 나누어진다. 

무엇임의 관점에서 보면, '온전히 무엇임'과 '아예 어떤 것도 아님'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있음과 무엇임을 한 번에 같이 생각하면 '온전히 무엇으로 있음'과 '아예 어떤 것도 아님으로 없음' 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자세히 보면 더 복잡하다.

불사조는 '그저 무엇으로 있지만 아니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엇임을 담은 개념으로만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나의 세째 자녀는 '그저 있을 법 한 것'일 뿐이다. 지금 있지 않지만, 있음의 가능성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두 아이의 아빠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둘째 자녀는 "온전히 무엇으로 있음'이다. 무엇임도 분명하고 그 있음도 분명하다.

'최고의 철학자 유대칠'는 '아직 아니 있는 있을 법 한 것'이다. 이것은 아예 없지 않고 지금 유대칠에게 가능성으로 있다. 있을 법한 것인데, 그저 있을 법 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니 있는 있을 법 한 것,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있을 법한 것이다.  

'아예 어떤 것도 아님으로 없는 것'은 무엇임도 있음도 채워지지 않은 것으로 엄밀하게 우리의 이성 속에도 아예 없는 것이다. 말로 적었지만 사실 이런 말로로도 무엇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것을 왜 궁리하고 있는가?

'진짜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거짓으로 있는 것에 속지 않기 위해서다.

'진짜 좋은 것', 그것을 제대로 부여잡기 위해서 우린 '온전히 무엇임으로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짜로 있는 '나'가 아닌 진짜 제대로 있는 나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철학자 유대칠을 꿈꾸며 존재하는 유대칠은 철학자 유대칠이 아닌 철학자 유대칠이란 꿈을 향하여 덜 철학자 유대칠에서 더 철학자 유대칠으로 나아가는 완성의 여정, 채워짐의 여정을 나아가는 있음의 여정이 진짜 유대칠이다. 그냥 여기 있는 유대칠이 진짜 유대칠이 아니라, 덜 있는 것을 더 있는 것으로 채원하는 그 여정 속에 온전히 있을 뿐이다. 결핍을 채우며 완전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 진짜 유대칠이다. 

 

2020.05.18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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