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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부모를 위한 철학 5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6. 23.

나는 나의 아이들을 잘 모른다. 내가 온전히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래서 내가 아는 나의 아이들로 나의 아이들을 만들려는 순간, 나는 아이들을 식민 지배 하는 침략군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나의 눈치를 볼 것이고, 나의 기대치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에 대하여 부모의 검열을 당연시 할지 모른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새로운 존재, 엄청난 가능성의 존재는 부모의 관념 속에서 구속된 초라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나를 너무나 잘 알던 한 친구는 내가 닭을 먹지 않는 시간을 잘 알았다. 그것을 아는 친구는 많지 않다. 나는 강의 전에 닭을 먹지 않는다. 집에서 가족들과 있으면 닭을 즐기지만 밖에 나와 학원 강의를 하거나 이런 저런 일을 할 때, 닭을 잘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닭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 그냥 느낌인지 객관적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렇다. 시간 강사 시절, 누군가 닭고기 먹으러  가자 할 때, 모두가 맛집에서 닭을 먹을 때 나는 그냥 밥을 먹었다. 한 시간 뒤에 강의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내가 닭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하거나 닭을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냥 닭으면 배가 아파서... 라고 말해도 그들 기억 속엔 맛집에 가서 그냥 밥만 먹은 사람 정도의 기억이 더 크다. 세밀하게 잘 기억하지 않으니 말이다. 심지어 수년 동안 나와 함께 공부한 이도 나를 닭 먹지 않는 사람으로 안다.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전, 나는 닭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혹시라도 먹지 않던 음식을 먹으면 발표 전이나 강의 전 꼭 화장실에 간다. 그것이 번거로우면 먹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나의 아내는 내가 닭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안다. 닭이라면 자다가 일어나 먹을 사람으로 안다. 20살때 부터 나와 같이 공부한 분은 아내와 반대로 아는데, 나와 10년 이상 산 아내는 그렇게 안다. 오히려 내가 닭을 조금 먹으면 아내는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갑자기 논문을 적어야 하거나 그러면 그런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닭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닭을 먹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그냥 다 정답이다. 내가 매번 길게 왜 닭을 먹지 않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해도 기억에 남지 않으며, 그들에겐 나의 단편을 그냥 그렇게 나의 모두라고 생각하는 편이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닭만 먹으라 한다면, 그것은 나에겐 일종의 고통이다. 그렇다고 닭을 절대 주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에겐 일종의 고통이겠다. 그런데 대부분 그냥 그렇게 나의 조각을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산다. 나도 아마 그렇게 누군가를 생각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조심 조심 하는 부분이고, 그래서 남에 대하여 관념 속에 구속하지 않으려는 것이 나의 그에 대한 가장 큰 노력 가운데 하나다. 나의 친구이든 나의 아이들이든 말이다. 

사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감히 알겠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를 이런 저런 사람이라고 그 조각을 나의 모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일까?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은 저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있을 권리가 있다. 그 모습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남을 아프게 하고 남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모습으로 그가 주도하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 속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말이다. 나는 내 딸 아이가 인형으로 금새 이야기를 만들어 노는 모습이 참 좋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몫을 하며 진행된다. 딸 아이는 쉼 없이 생각하며 그 다음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별 것 아닌 인형 놀이지만 ,그 놀이가 정해진 틀 속에서 개임을 즐기는 인터넷 게임보다 더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요즘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을 아예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의 인형과 친구가 되고 이름을 짓고 그렇게 자기 세상을 만들어 즐기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그 자체가 창의성이고 그 자체가 자존감이라 생각한다.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부모의 눈치 속에서 자신을 찾으러 하기 보다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자기 이야기를 적어가기 바란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이런 저런 아이라고 규정하듯이 이야기한다. 그렇게 살다 보니, 항상 부모의 대체품을 찾으며 다닌다.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기 보다는 누군가 지도자가 되어 이끌어주면 편하기 때문이다. 때론 종교가 때론 자기개별서가 부모가 되어 회초리를 들고 아직 무능하고 부족하다며 빨리 더 달리라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대체품이다. 부모의 눈치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칭찬 보다는 질책에 익숙하다. 무엇인가를 잘하는 자신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못하고 실패하는 자신에 익숙하다. 그래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은 보지 못하고 항상 부정적으로 자신을 파악하고 그것을 당연시 한다. 그러면서 지금 자기 주변을 벗어나야할 그 무엇이라 생각 한다. 그래서 항상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외롭다. 눈치 속에서, 남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보아왔기에 한번도 자기를 자기 스스로 외로하고 보담으며 긍정하지 못해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부모였다. 

누군가를 칭찬하고 긍정하기 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그 부러움 속에서 자신을 무시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실패를 지적하던 부모의 시선이 그에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 것이다. 

부모, 가장 힘들지만, 어쩌면 부모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모범이 되는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행복이 무엇인지, 가족들과 추억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 보다, 질책과 포기를 먼저 배운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너는 닭을 좋아해! 강요하지 말고! 너는 닭을 싫어해! 강요하지 말고! 너는 누구보다 이것을 못해! 비교하지 말고! 

우리의 아이는 우리의 관념 속에 구속되기에 너무나 엄청난 존재들이다. 비록 그들이 평범한 일상의 평범한 누군가가 되어 살게 되어도 말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을 모른다. 알아가며 살 생각이다. 이 두 아이도 스스로를 알아가며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대칠 2020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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