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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부모를 위한 철학 3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6. 13.

결혼 전 일이다. 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할 떄다. 학원의 국어 선생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준비하고 엄청나게 잘 강의했다. 평소, 조금 무서운 얼굴이지만, 강의만 하면 코미디언 같기도 했다. 유리창 넘어 본 그 선생의 모습은 과연 같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선생들은 그를 조금 싫어했지만, 나는 그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학원에서 그와 가장 친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강의 전 무서운 얼굴은 머리 속에서 강의를 리허설하는 것과 같았다. 지역 고등학교 내신 문제의 경향을 파악하고 학생들 이해를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학원이 아니라, 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싶어 했지만, 당장 그의 아버지와 그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며 만든 빚 10억원을 해결해야하기에 학원에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며 살았다. 그렇게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3-4년 만에 다시 대구 동성로 어느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여전히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극도의 우울감과 절망감은 같이 앉아 차를 마시는 한 시간 정도... 나에게도 스며 들 정도로 대단했다. 그 사이 빚은 대부분 값을 정도의 인기 강사였지만, 그의 동생은 그가 번 돈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이런 저런 조언을 하는 언니에게 까탈스러운 인생의 방해꾼이란 독설을 남긴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과장을 걸러 들어도 그리고 내가 아는 그의 동생을 봐도 대충 상상이 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녀의 학원 선생 생활을 고집했다. 그러며 그들은 나름 그렇게 부유하지 않아도 여기 저기 놀러 다니며 오히려 누구의 부모는 외국도 가고 호텔도 가는데 자신들은 그저 작은 펜션으로 만족한다 말한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장녀의 희생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너무나 필요한 것이었다. 그가 대학생때부터 그는 돈을 해결해야했다. 그렇게 강사를 하고 때론 다른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그 돈을 해결하고 부모도 동생도 기죽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자신의 보람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데 40살이 되었을 때, 가족이 모여 성공한 강사와 대기업 직원이 된 두 딸 앞에서 우는 부모, 자신들이 살다 보니 이런 것을 본다며 우는 부모를 보며 그 선생은 묘한 감정이 든 모양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희생이었다. 그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고, 부모도 동생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부터 그는 달랐다. 그러나 부모는 다른 집 아이들은 더 잘 하는데, 왜그러느냐... 한마디로 너는 왜 못 참는지 그를 오히려 탓하며 동생 도와준 것이 그렇게 아까우면 자신이 죽으면 지금 사는 집 너가 벌어서 구한 것이니 너 해라... 이렇게 말한 모양이다. 부모는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희생했고, 부모는 그에게 계산을 하려 한 것이다. 그는 점점 살이 찌더니 지금은 거의 걷기 힘들 정도다. 동생은 솔로의 삶을 즐기겠다며 돈 들려 다이어트하고 살아가는데... 그는 집이 싫어졌다. 그때 3-4년 만에 나에게 연락하여 부탁한 것은 상의였다. 그의 독립을 상의할 사람이 었었다. 3-4년 전 같이 일하던 나가 생각이 난 것이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살이 올랐고, 변한 모습 때문인지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데 힘들어했다. 

양희은의 노래를 보면 어머니는 딸에게 너의 길을 가라 한다. 그런데 나의 주변, 많은 어머니는 딸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가라 한다. 남들도 모두 그렇다면서 말이다. 남동생 뒤를 돌봐주며 살다 사고로 죽어 버린 친구의 보험금 마저 남동생의 아파트가 된다. 남동생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고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까? 그가 마지막으로 그 아파트와 아버지의 대학을 선물했다는 것을 알까? 그 모든 것을 기억해야할 친구의 어머니는 그 깊은 아픔을 남동생을 보며 위로를 얻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다 느끼는 것일까? 강사로 죽을 힘을 다해가며, 친구 하나 만들지 못하고, 연애 한번 하지 못하고, 20대와 30대 그리고 40를 바라보는 그에게 부모와 동생은 누구일까? 

현실 속 외로하는 벗도 사랑도 현실에선 없는 경우가 많다. 그냥 혼자 외롭다, 혼자 방에 들어가 혼자 인터넷을 즐기고 혼자 운동하며 시간을 보내다 그냥 혼자 죽는다. 그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느끼게 해주어야할 부모는 그저 이용하는 법만 가르친 것은 아닐까? 나는 그에게 여행을 권했고, 그는 프랑스 여행을 떠났다. 그가 번 돈으로 온전히 그를 위하여 쓰며 그의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 시간, 그는 있지 않았다. 이제 그가 홀로 두 발로 서서 조금 더 큰 세상으로 나와 더불어 살아가길 응원한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살찐 무엇무엇이라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는 어느 스포츠 센터의 어느 나쁜 강사에게 비록 거짓이지만... 내가 그의 애인이라며 항의 전화를 해 욕을 한 바가지 해 주었다. 그것도 고맙다는 사람, 약이 필요한 사람, 여전히 아픈 사람, 이제 그 오랜 아픔을 이기고 더불어 더불어 더불어 살아가길 응원한다. 

그리고 부모로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사랑이라며 소유하는 것도 나쁘지만, 나는 돈이 없다, 나는 무력하다. 이런 이유 속에 자식을 물건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무력하다는 그 이유 속에서 미안함도 그저 말뿐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말이다. 

유대칠 

2020. 06. 13

부산에서...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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