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성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성리학 전공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사실 나에게 여전히 조선 성리학은 권력의 시녀 혹은 권력자의 시녀였다. 성리학의 소신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결국은 자기 기득권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성리학을 익힌다는 것은 결국 순수한 학문적 그 무엇이 아닌 정계에 진출함이다. 성리학이란 공간에서 누군가의 제자라는 것은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닌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정치 권력에서 자신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성리학은 그렇게 조선 시대 양반들에게 실용적이었다. 결국 나라를 일본에 넘긴 것도 그들이었다. 성리학을 버려도 큰 문제 될 것은 없다. 시녀를 버리고 또 다른 시녀를 선택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지금 철학은 조선 시대 성리학과 같은 쓰임이 없다. 그것을 배운다고 권력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철학을 배운다고 정치 권력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적 허용이다. 양반들이 주역의 원리를 녹여내 시조를 만들어 기생과 놀듯이 그렇게 철학은 가진자들의 여유로운 장신구 정도였거나 그것도 되지 못했다.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모슨 수용인가? 많은 철학자들은 철학이 왜 필요한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독일의 이야기를 하고 프랑스와 미국의 이야기를 한다. 다 소용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철학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그곳에 살지 않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다. 철학과가 지금 이곳보다 더 많고 좋은 곳은 이곳보다 더 빨리 공학을 발전시켰지만, 이곳보다 덜 좋은 휴대폰을 만들고 이젠 차도 이곳의 회사가 더 잘 만들기 시작한다. 철학이 없어도 그들보다 더 잘 의학이 발달하고 공학이 발달하고 기업은 커지고 사람들도 큰 문제 없이 산다. 철학이 발달했다는 곳도 코로나19의 비극 속에서 보면 그저 이기적이고 불안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철학과가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은 것은 민중에게 어떤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없어도 부자가 되고 없어도 기술을 잘 발전하고 있다. 철학과가 있어도 코로나 19 앞에 헛짓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인종차별도 다르지 않다.
철학, 보편학으로 철학은 이제 스스로 개별학으로 있으려 하지 말고, 모든 학문에 개별적인 성과로 나아가기 이전 보편적 사유,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 대학생이 입학하면 익혀야하는 보편적인 것, 교양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논리학이나 윤리학은 공대생에게도 의대생에게도 농대상이나 미대생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다. 논리학도 마찬가지다. 개별학이 나아갈 합리성을 미리 훈련하는 장으로 철학과는 대학의 기초 과정을 담당하는 곳이 되어가는 편이 지금의 철학과보다 더 나을 듯 하다. 철학과는 극소수의 박사를 양성하는 대학원으로 있게 하고, 대학에선 대학 입학생을 위한 교양이나 개별학 이던 기초로 보편학을 강의하는 편이 좋겠다.
철학과는 원래 돈이 되지 않는다. 철학과가 지금 그마나 쓸모를 구하려면 다른 모든 학의 예비학으로 철학 정도일듯하다. 다른 모든 학의 시녀로 말이다. 그나마 대학이란 공간에서 철학과가 쓸모를 유지하는 방법이겠다.
그나마 잘 되지 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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