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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가족도 우리가 되지 못했다. (부모철학 2020 07 20)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7. 20.

친구가 그렇게 친하던 어머니와 크게 싸우고 다시 보지 않는다. 친구는 수능도 잘 쳤지만, 가난한 집의 장녀라는 이유로 전문대를 갔다. 그리고 졸업을 하곤 홀로 있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번 돈을 모두 드렸다. 나는 그때도 반대했지만 그는 불쌍한 어머니라고 자신이 도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주변에 돈놀이를 잘 하는 친구를 둔 어머니는 대출을 받고 이래 저래 아낀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 등등 결국 집을 3채로 불렸다. 비싼 집은 없지만 말이다. 친구의 생각과 달리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도 있었고, 그 이외 딸이 모르는 집의 돈이 어느 정도 은행에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는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지만 참았다. 고생하며 살았으니 그 정도 누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냥 산술적 계산을 해도 3채 가운데 한 채 반은 친구의 몫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은 남동생의 것이 되었다. 결혼을 할 때 남은 가진 돈마저 모두 어머니에게 주고 왔는데, 그것은 남동생의 차가 되었다. 자신이 결혼 이후 남편의 건강 문제로 돈이 필요해 빌릴 때는 빌린 것이라면, 1년 뒤 은행 대출을 받아서라도 돌려 달라 했는데, 그 돈도 남동생의 결혼 비용이 되었다. 아픈 남편에 저소득 직장인 자신의 조건으로 대출도 힘든데... 결국 그 친구의 어머니는 그 돈을 받아갔다. 결과적으로 1원 하나 모으지 않은 남동생은 친구가 12년 동안 번 돈을 모두 가진 셈이다. 그러나 남동생은 모른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이라 생각하니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것인데... 그렇게 그 놈은 순식간에 2채의 집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남동생에게 걱정의 말을 하는 친구에게 큰 소리를 치며 기죽이지 말라는 어머니에게 친구는 한 소리를 한 모양이다. 결국 그것이 '딸의 운명'이라는 말에 친구는 더 이상 어머니와 연락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둘째도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 하지 않는데 너는 왜 그렇게 유별나냐며 말이다. 둘째는 심한 강박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잠시 그의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사무실 물건들을 무섭게 각을 잡으며 정리했고,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상당히 힘들어했다. 그것은 성격이 아니다.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때 병원을 권했다. 말이 없는 것은 선택적 함묵증이다. 그러나 그런 진단을 무시한다. 그냥 둘째의 성격이다. 둘째도 모두 어머니에게 가져다 준다. 대학을 다니다 중단 시키고 말이다. 지금은 어느 공장 경리로 있으며... 그렇게 힘들게 벌어 어머니의 경제적 조달처가 된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말이다. 이것이 그 어머니가 말하는 딸의 운명인가. 딸의 운명... 사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딸에게 고통을 나누자면 결과적으로 많은 것을 앗아가는 부모들은 많다. 또 다른 나의 친구도 결국 이 세상에 믿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결국 아들 뿐이다. 아들이 더 좋은 사람이고 자신은 소비되는 존재이고 말이다. 그 친구는 혼자 산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며 말이다. 가정은 위안의 장소가 될 수 없다 그는 확신한다. 아들은 그렇게 보호를 받으며 역시나 우리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기 소리만 낸다. 결국 딸도 아들도 모두 불행하다.

40을 넘어 아이의 부모가 된 친구는 걱정이다. 자신이 그와 같은 가해자가 될까... 두려워한다. 자신의 존재가 고마움과 소중함이 아닌 고마움과 소중함이란 포장지로 싸인 폭력이 되지 않을까 말이다. 나 역시 그 두려움 안에서도 조심하고 조심한다. 부모, 어쩌면 자녀의 삶에 한 없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고 아픔이고 눈물일 수 있다. 나는 친구보다 10여년 빨리 아빠가 되고 지금 5학년과 2학년의 아빠이지만 항상 돌아보고 돌아본다. 나쁜 부모! 불행을 남겨주는 부모가 되지 말자!

더 사랑하지 않고 더불어 사랑하자! 그것이 중요하다. 더 와 덜이 아닌 더불어 사랑하자!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은 돈을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말이 아니다. 

그 말! 지금 그 말의 따스함 없이 살아온 이의 눈물이 힘겨운 것이다.

자식의 이름으로 돈을 빌리는 부모... 자식이 죽었는데... 사망 보험감을 받으러 수십년 만에 나타난 부모... 정도의 차이일 뿐...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도 정말 부자들이 보면 좋은 아파트 한채 값도 안 되는 3채인데... 그것도 그렇게 지옥 속에 산다. 지옥 말이다.

돈 앞에서! 오직 아들 사랑이란 이름 앞에서! 가족도 우리가 아닌 이 땅의 많은 딸들이 있다. 그런데 아들도 제대로 우리가 되지 못했다. 우리를 집에서 부터 살지 못한 것이다. 슬프게도...

유대칠 

2020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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