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거나 밀리거나 이 둘로 세상을 그렸다. 행하거나 당하거나 말이다. 신은 행한다. 신은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의 당함, 라틴어로 passio, 즉 수난이란 말이 충격적이다. 신은 어떤 당함도 없이 순수하게 행하기만 해야 한다. ‘부동의 원동자’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스스로는 어떤 것으로 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오직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할 뿐이다. 이런 존재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신이었다. 인간의 영혼 역시 이와 같다. 순수한 인간의 영혼은 육체에 당해서는 안 된다. 육체를 지배해야 사람은 사람다운 존재가 된다. 헬라의 철학에서도 동아시아의 철학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철학에서도 대체로 이런 주장들이 강하였다. 마땅히 당해야하는 육체에 당하면 사람은 쾌락에 빠져들어 제대로 행복하지 못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도 못한다.
우리는 ‘열정’이라고 부르는 ‘passio’는 앞서 보았듯이 ‘수난’이란 말도 된다. patior란 말에 명사 어미인 tio가 더해진 것으로 ‘당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사랑’을 생각해보자. 사랑은 하고 싶어서하고 하기 싫어서 하지 못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어느 부인은 자신의 남편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다. 그런 마음이 도저히 올라오지 않아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으며, 사랑하려 노력해서 사랑할 수 없기에 그 부인은 그 남편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게 된단 말이다. 되어져야 한다. 하고 싶어 되지 않는다. 수동에 근거한 능동이다. 참된 사랑의 마음은 피할 수 없는 당함으로 이끌지만 그 이끌림으로 자신이 능동적으로 손을 잡고 나아가야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게 되어지는 것, 누군가에게 다가가게 되어지는 것, 되어지는 것을 피하려하면 아픔으로 또 다른 당함이 찾아오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하게 되어지는 것엔 지배도 피지배도 없다. 나는 행하는 주체이지만, 동시에 나는 당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며 지배의 자리에만을 강조하고 지배의 자리에만 서려 하면, 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너지고 하는 것과 되는 것은 대립되어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한다. 되어지는 사랑을 굳이 피하며 아파하고 행하는 주체가 되어 지배하려 한다. 둘 사이에서도 내가 이성이 되고 명령하면 너는 내 생각을 구현시키는 의지가 되어라 규정하낟. 나는 이성이고 너는 나의 수단이란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답답해 한다. 너는 나의 이성 속, 나의 생각 속에 구속되어 존재하는 그 모습으로 존재해야하는데, 그 존재 자체가 나에게 구속되어 지배되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남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으로 지배당한 우리편, 나의 편이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편이 아니면, 나의 행함에 지배당하는 당함의 주체들이 아니면 모두 청소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결국 나의 행함의 지배 대상이 아닌 현실에서 청소해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밀거나 밀리거나의 세상, 당하거나 행하거나의 세상, 이 둘이 나누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풀 하나도 풀로 살아있음으로 이미 당하며 행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사람은 그 이치에서 벗어나 홀로 행함의 주체이기만 고집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만이 다른 동물 없는 아픔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자아라는 허상을 행한의 주체, 주인으로 고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불행의 시작일지 모른다. 행하고 행하고 행하기만 할 수 없는 것이 운명임에도 말이다.
유대칠
2020 07 16
'더불어존재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체와 주체의 만남 (0) | 2020.08.21 |
---|---|
가족도 우리가 되지 못했다. (부모철학 2020 07 20) (0) | 2020.07.20 |
나는 이론의 종이 아니다. (0) | 2020.07.12 |
지금 우리에게 철학은 쓸모있는가? (0) | 2020.07.11 |
'울고 있음'의 터에서 (0) | 2020.07.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