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1950년 작품 '풍경'이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다. 사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철학사를 객관적 사실이라 보았다. 철학사의 주체가 가진 시선이 객관적이라 믿었다. 아니 그 정도의 고민도 없이 그냥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 풍경이 주관적 사실이듯이 철학사 역시 주관적 사실이다. 주관적 사실이란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순간이 때론 그 크게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저런 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그려진 풍경화는 추상화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추상은 주관의 자신감이다. 내가 나오 있을 때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것을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 사물의 모습들이 살짝 보인다. 그러나 서서히 이응노는 이응노가 되어 간다. 스스로의 주관 속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그의 그림이다. 그리고 그 그림으로 그려진 그의 시선만이 답은 아니다. 그의 추상만이 우리에게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이 그림이 모두에게 뜻으로 다가오지 않듯이 그의 주관은 그의 주관이고 객관은 아니다. 나 역시 주관이라면 이 그림으로 나의 풍경화를 그려야 한다. 추상을 그려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붓 없이 이응노의 그림을 따라 나만의 보이지 않은 추상화를 하나 그려낸 셈이다. 나의 영혼에 박힌 추상화말이다.
유대칠 2020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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