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한 포기의 하느님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분 계심이 나의 언어에 한정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는 나의 생각의 반영이고, 나의 생각은 항상 나의 욕심 속에서 한정되기 쉽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눈 앞에 작디 작은 잡초 하나 하느님 손길 아니 있는 곳이 없지만 나의 욕심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말로도 그 작은 잡초 하나의 몸짓에서 하느님을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니 나의 하느님 역시 저리 작게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욕심 속 나의 시선이 아닌 저 작은 잡초가 되어 본다. 마땅히 누군가 관리해 주는 것도 아니다. 제법 좋은 식물원의 관리 받는 식물과 너무나 다르다. 줄을 서 자라고 있지도 않고 여기 저기 참 어지럽다. 질서 없이 그저 여기 저기 참 혼돈 속에 있다. 조금 작은 잡초라면 지나는 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밟혔는지 종종 한 쪽 잎사귀는 아예 길거리에 짓니겨져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다. 그 가운데 사람의 눈엔 볼 것 없는 그 잡초에 흙은 영양분을 내어주고, 물과 바람 그리고 태양열은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사람의 눈엔 없어도 그만인 그 혼돈 속 존재에 하느님의 다른 피조물, 하느님의 또 다른 드러남인 그 많은 하느님의 모습들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며 그를 안아준다. 어느 날 발에 밟혀죽어도 다시 자라는 생명력은 참으로 신비롭다. 그 가운데 하느님 계심을 본다. 하느님 숨 안에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어주며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 소중한 무엇을 내어주지 않아도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그렇게 더불어 있다. 그렇게 나는 잡초 한 포기의 있음에서 하느님 계심과 나의 여기 있음과 우리의 여기 있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하느님은 영광 가운데 거대한 승리자로 계시며 이 역사를 승리자의 모습으로 지배하며, 강자의 편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 이 작은 생명의 몸짓으로 그리고 그 몸짓과 더불어 있으며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온전히 사는 작디 작은 잡초는 그 작디 작은 생명에 절망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향하여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는 모든 것들이 그 하루 하루를 함께 그러고 있다. 나의 언어가 나의 종교 나의 생가 나의 문화 나의 지식으로 한정될 때, 하느님은 그 벽의 밖에 계실 수 있다. 결국 하나씩 경계를 무너뜨리며 나의 욕심과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 밖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삶이 신앙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내 이웃과 내 사는 이 모든 환경은 하느님을 향한 내 여정의 장이라 믿는다. 나는 나로 인하여 웃는 누군가의 희망에서 하느님을 향한 내 걸음을 읽는다. 아주 아주 조심스럽데 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됨으로 기억될 그 순간 속 내가 녹아 사라졌음을 기뻐한다. 나는 경계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도 한 걸음 더 다가셨기 때문이다.
유대칠 2020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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