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요한복음서> 12장 21절을 마주합니다. 몇몇 사람들이 필립보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이 말이 오직 그들의 말이기만 할까요. 우리도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5장 8절에선 마음이 깨끗한 자만이 주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우리 주님을 뵙기 위해 우선 이 물음부터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저런 욕심으로 만들어진 아집으로 보면 오직 자기 욕심의 관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땅으로 돈을 벌려는 이들에게 저 아름다운 산도 돈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애쓰며 살아가는 농부의 애씀보다 자기 돈이 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또 누군가에겐 가난한 이들이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어느 작은 건물도 더 큰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보일 것입니다. 건물을 허물고 그 가운데 사람들을 쫓아 버려도 그들의 아픔보다는 자신의 돈이 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돈으로 세상을 보는 이는 의사가 되고 법률가가 되어도 돈이 환자의 아픔보다 때론 사회의 정의와 공정보다 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 하느님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두고 그 좋음을 보았다 하셨습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도 그들에겐 더 돈이 되고 덜 돈이 되는 세상으로 보일 뿐입니다. 더 많은 돈을 내었으니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더 가까이서 주님을 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너는 성당과 교회에 얼마의 돈을 내었느냐! 나만큼 내었느냐! 당당하게 소리치며 하느님과의 거리도 돈으로 줄이려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필립보에게 돈을 쥐어주면 주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천국으로 보내줄 나를 위한 존재로 예수를 생각한다면, 결국 예수를 보겠다는 신앙도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일 뿐입니다. 성당과 교회 생활도 사후 미래를 위한 투자일 뿐입니다. 마음 속으로 항상 나는 이 만큼 투자했다는 생각이 있는 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보일까요? 그들이 보려는 그 예수가 정말 예수가 아닌데, 예수가 그들에게 보일까요? 그들이 보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욕심 속 만들어진 아집의 조각일 뿐인데, 그들이 예수를 볼 수 있을까요?
더 가지려는 마음. 더 있으려는 마음, 더 높아지려는 마음… 어쩌면 우리 일상의 삶 속 그 흔하디 흔한 마음들이 때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떄론 나를 항상 불안하게 합니다. 더 가져야 하는데… 더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더 높아져야 하는데… 더 큰 교회 건물을 세워야 하는데…. 더 큰 아파트에 살야 하는데…. 이런 마음들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여 아프게 하고 또 누군가의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가난하고 힘들 이들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더 많이 가짐을 자랑하며 더 우월한 승리자의 자리에서 낮은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자기도취 혹은 자기 우월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런 이들의 선행, 이런 이들의 마음, 그 마음이 깨끗할까요?
항상 받을 것을 계산하는 우리에게 욕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받을 마음으로 없이 내어주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깨끗한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와 더불어 있어 주신 바로 그 마음, 내어주는 마음, 어쩌면 바로 그 마음이 가장 깨끗한 마음이 아닐까요? 어쩌면 내어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뵙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나의 욕심이 혹은 나의 아집이 나를 움직이고 나의 시선을 지배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혹은 항상 계산을 하며 그 결과의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마음, 계산하지 않고 아픔의 옆에 자기를 내어주는 그 마음, 그 마음을 위해 애쓰고 돌아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보려는 애씀이 아닐까요….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걸음이 아닐까요?
오늘도 예수님에게 힘겨운 한 걸을 다가가기 위해 나를 돌아봅니다.
2020 09 30
유대칠 암브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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