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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불행하여라 1 - 불행하여라, 윗사람으로 살려는 이들이여!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23.

<마태오복음> 23장 11-16절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엄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행복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이 묵상하곤 합니다. 저 역시 예수께서 <마태오복음 > 5장에서 전해주신 행복한 이에 대한 말씀을 어려서부터 때가 되면 묵상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는 생각에 정말 제대로 행복하기 위해 또 하나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불행한 이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이란 무엇일까요? <시편> 34장 20절에 따르면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 합니다. 의로운 이는 그 의로움으로 수많은 고난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지 모릅니다. 사실 의로운 이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항상 아프고 힘든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윤동주 시인의 시와 같이 부끄러운 그런 길입니다. 부끄러우니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아프고 힘든 길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말합니다. 참 의로운데 저는 왜 저리도 힘든가. 그런데 그 의로움은 어쩌면 힘겨운 고난의 삶을 기꺼이 살아가려는 이들이기에 어쩔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그 불행에서 구하신다 하십니다. 사실 의로운 이의 그 힘겨움은 진짜 불행은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제법 험한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복음> 5장 6절에서도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의로운 이는 하느님을 향한 그 고난의 길이 있어 괴롭고 때론 깊은 아픔에 아파하고 있다 해도 사실 그 길은 진짜 불행한 길이 아닙니다. 흡족해질 길이며, 예수께서 '행복하여라' 축복해주신 길을 걷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진짜 불행, 힘들게 하느님을 향하는 이의 불행으로 보이지만 정말 제대로 행복한 길을 걷는 이의 그 불행이 아닌 정말 제대로 된 불행, 즉 행복이 없는 불행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마태오복음> 23장에서 그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행복할 것으로 보이는 높은 곳에서 자신은 윗사람이라 여기며 아랫사람을 이리저리 부리는 사람들, 아프고 힘들 이들의 아픔이 더불어 울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아는 선생이라도 되는 듯이 이런저런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그저 그 높은 자리를 즐기며 낮아져 아프고 힘든 자리를 찾아가지 않는 이들, 바로 이러한 이들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이를 죽이고 엄청난 권력을 누리며 거짓으로 살아가는 독재자의 모습에서 행복을 본다면 그것은 제대로 행복을 아는 이도 아니고, 불행을 아는 이도 아닙니다. 정말 제대로 본다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정말 제대로 본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악인의 길을 걷고 있으며, 또 수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는 이 사회의 종양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닙니다. 차라리 초라하고 아파하는 눈물의 길이 행복의 길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선 연옥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생에서 우린 연옥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가운데 죽었지만 아직 온전히 깨끗해지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온전히 정화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그러니 바로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정화의 단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연옥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죽었지만 여전히 연옥의 영혼은 우리와 더불어 있습니다. 여전히 더불어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면 천국의 영혼들, 이미 온전히 정화된 그들,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린 그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 청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잘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압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와 같이 이 땅에서 이런저런 많은 고난의 시간, 유혹의 시간, 분열과 다툼의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 천국에서 어쩌면 그들은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천국에서의 행복도 그와 같이 더불어 있음의 행복이 이어집니다. 그저 이룰 것, 다 이루었으니 기쁘게 웃으며 지내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우리를 위하여,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고난 속 하느님을 향한 고난의 길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눈물로 하느님에게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인의 자리에 있는 분들, 이미 천국에 있을 그분들도 어쩌면 천국에선 그렇게 울보가 되어 하느님에게 우리를 위해 눈물로 청하며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그 눈물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연옥의 영혼과 더불어 하나 되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천국에 이른 이들은 우리와 더불어 하나 되어 우리를 위하여 청하는, 바로 그러한 삶, 삶과 죽음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더불어 있음이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진정한 보편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옥을 이야기하지 않는 개신교회도 더불어 있음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나는 그저 나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될 일입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있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 있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말 있어야 하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예수는 그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이 그저 자신의 기쁨이나 편리만을 위해 있었다면 이 땅에 아예 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있어 주셨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더불어 하나로 있음을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가온 그 고난의 길, 그 길을 걸었던 예수는 불행한 분이실까요. 아닙니다. 그분은 행복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렇게 그분이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의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너와 더불어 우리로 하나 되어 나가 아닌 우리 가운데 너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우리는 종교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를 저주하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있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더불어 있는 것, 나에게 돌아오는 눈에 보이는 결실이 하나도 없어도 그렇게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며,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정말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높아지고 싶으면 낮아져라 우리에게 참으로 어려운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윗자리에 있던 그분이 아랫자리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정말 높은 자리는 낮은 이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낮은 이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행복의 자리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마지막 글이 생각납니다. 죽음을 앞둔 너무 고통스러운 가운데 선생님께서는 북녘 어린이의 아픔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글로 모인 돈을 그 어린이들을 위해 쓰라며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지막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어디 좋은 대학 출신인가요. 초등교육을 받은 시골 교회 종치기의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글이 유명해지고 그 덕에 모인 돈들도 그분은 스스로 높아지기 위해 쓰지 않으셨습니다. 한 없이 낮아지고 낮아지며 그 자리에서 웃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권정생 선생님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 자기개발서라는 이름의 많은 책은 앞서 가라 합니다. 지지 마라 합니다. 더 높아지라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더 강한 투사가 되어 이기며 살라 합니다.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라 합니다. 그렇게 성공한 이들, 좋은 대학을 나와 흔히 이야기하는 법률가, 의사, 정치 권력가, 종교 권력가가 되어 있어도 많은 경우 낮은 이의 아픔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저 더 놓아지고 더 누릴 생각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만이 답이라 주장하며 공부 못하고 적게 버는 이들을 어리 석인이라 조롱해 버립니다. 청소 노동자의 그 고마운 노동을 보며 저렇게 살면 된다는 말을 한 어느 변호사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납니다. 정말 그렇게 살면 안 될 모습은 무엇일까요? 위험한 새벽 시간 우리를 위해 노동하는 이의 삶이 더 행복할까요? 아니면 그를 조롱하며 비하하며 자신의 높음을 과시하는 이가 더 행복할까요?

우린 더불어 있습니다. 천국의 성인들도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작은 신학적 차이도 넘어서지 못하고 이런저런 사회적 모습의 차이도 넘어서지 못하면서 편을 지어 낮은 이를 조롱하며 스스로를 높이는 이들의 삶은 우리의 신앙에선 진정 불행한 것이다. 작은 신학적 차이는 서로 다름을 알면 그만이고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고 궁리해야 할 것은 어찌하면 이 사회의 부조리로 아파하는 이들과 더불어 있을 것인가일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어도 하느님을 향한 행복의 여정이니 말입니다. 종교의 차이, 성별과 문화 그리고 직업의 차이, 이런 것을 벽을 만드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낮아지고 낮아져 낮은 이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그들 눈물의 손수건이라도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한 동안 예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불행'에 대한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묵상하며 글로 남기려 합니다. 오늘도 나를 돌아봅니다. 나는 얼마나 낮아졌는가. 항상 부끄러움으로 남는 그 돌아봄 앞에서 조금 덜 부끄러운 우리이기 위해 매일매일 다짐해 보아야겠습니다. 

2020 10 23

유대칠 암브로시오

 

[한동안 '불행하여라' 하신 예수의 <마태오복음> 23장 말씀을 묵상하며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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