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 23장 11-16절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엄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예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의 아픔에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들을 도와준다고 돌아오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그럴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아오는 것 없는 일은 모두가 헛 일처럼 여겨지니 말입니다. 내가 이 만큼 애쓰면 그만큼의 무엇이 이익이 되어 돌아오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이유가 없다 생각합니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를 자본주의에선 돈에서 찾았습니다. 고상한 말로 자본주의이지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돈 생각'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데, 혹은 지금 더 많은 돈을 벌기도 바쁜데, 돈이 되어 돌아오지도 않을 나눔을 한다는 것은 정말 헛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어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인지요. 그분은 우리의 앞에서 계산기로 무엇을 계산하며 무엇을 벌거나 취하기 위하여 하신 것인지요? 아니 조금 더 근원적으로 도대체 왜 천상에서 이 땅에 내려와 고난을 당하신 것인지요? 도대체 무슨 욕심으로 그러신 것인지요? 무엇을 홀로 얻기 위해 그리 하신 것인지요? 가만히 생각하면 예수의 사랑은 계산기를 들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아픔을 봅니다. 노숙자를 보면서 그 아픔을 보지 못하고, 저 사람은 사업을 하다 실패했으니 저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며 고개 돌립니다. 그런 노숙자를 만들어 내는 구조적 부조리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노숙자의 아픔을 보기보다는, 그렇게 자신이 돕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돕지 않습니다. 사회적 부조리에 분노하지 않고 아픔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손수건이 되어 주지도 않습니다. 우린 노숙자의 앞에서 계산기를 들고 그의 아픔을 외롭게 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 하실까요? 만일 그렇다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너희들 잘못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해라며 십자가 고난을 피하거나 아예 이 땅에 사람으로 찾아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그리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은, 계산기를 들지 않고 그저 우리의 아픔과 부족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항상 계산기를 들고 계산합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이용해서라도 더 많은 돈을 벌려합니다. 지하철 노동자의 죽음과 제철소 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택배 노동자의 죽음을 봅니다. 너 아니면 다른 사람을 쓸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 앞에서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냥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동에 노동을 이어할 뿐입니다. 명문대에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다른 길이 없어 그러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며, 그 현실을 이용해서 노동자를 이용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성당과 교회 그리고 절에 돈을 내어 놓으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을 합니다. 낸 돈만큼 하느님에게 가까워졌다 생각하는지, 혹은 그만큼 하느님의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목에 힘을 주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의 힘겨움 앞에서 계산기를 들고 이용하여 벌어 들인 돈으로 하느님에게 천국행 길을 구입하려는 듯이 행동하며 그것이 신앙이라도 되는 듯이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거룩합니다. 많은 돈으로 성당이니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남들 보는 곳에선 제법 거룩해 보이는 기도도 보입니다. 기도가 되지 못하는 삶, 하느님이 불행하라 저주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거룩할 수 있을까요? 그저 보이는 것은 거룩해 보이지만 사실은 거룩과는 멉니다. 오히려 거룩의 반대입니다.
더불어 살아감 없이 홀로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사회적 약자의 고통 마처 이용하는 이에게 하느님이 더불어 있으실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계산기를 들고 찾아가는 이는 하느님에게도 계산기를 들고 찾아갑니다. 그들이 많은 돈을 내어 놓지만 사실 그것은 하느님에게 천국 좋은 곳을 구입하려는 투기 일지 모릅니다. 하느님이 그런 거짓의 위선에 속을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입니다. 예수와 더불어 있는 신앙입니다. 그들을 이용하면서 누리는 부유함이 화려해 보이고 그들의 신앙생활이 거룩해 보이겠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하는 것이고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보아야 하는 것은 홀로 더 누리려는 이의 욕심과 아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여야 하는 것은 계산기를 버리고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구체적 삶의 노력입니다.
누군가를 이기며 누리는 행복이 예수의 사랑을 말하는 이의 행복일 수 있을까요? 예수의 행복은 더불어 있음의 행복입니다. 계산기를 버리고 아프고 힘든 이의 손수건이라도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게을렀습니다. 그리고 행복도 참으로 게을렸습니다. 또 다짐해야겠습니다. "나만 기쁜 홀로 기쁨이란 행복은 없다. 참된 행복은 항상 더불어 기쁨이다. 더불어 있음이다." 기억하고 다짐해야겠습니다. 행복해지는 것은 더불어 있다는 것을 다시 다짐해야겠습니다. 사회적 약자 앞에서도 계산기를 들고 있는 이의 기쁨은 불행입니다. 우리 열심히 진짜 제대로 행복합시다. 더불어 더불어 더불어 제대로 살아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제까지 참으로 게을렀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0 26
[한동안 '불행하여라' 하신 예수의 <마태오복음> 23장 말씀을 묵상하며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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