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장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을 헬라 사람들은 우시아(Ousia)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흔히 일본과 한국에선 '실체'라고 번역합니다. 실체는 다르게 되지 않으며 다른 것에 그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라틴어로는 숩스탄씨아(substantia)라고 합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악치덴스(accidens)라고 불리는 것과 다릅니다. 악치덴스는 흔히 우연히 있다는 의미에서 '우유'라고 번역합니다. 유대칠의 머리 모양이나 유대칠이 사는 곳 그리고 유대칠의 소유하는 것 등은 유대칠의 본질을 다르게 하지 못합니다. 유대칠은 대구에 사는 사람이지만 대구에 사는 사람이란 장소에 대한 서술이 유대칠의 본질은 아입니다. 유대칠은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대칠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렇게 유대칠에 대하여 서술되지만 본질은 아닌 것을 우유, 즉 악치덴스라고 한다면, 유대칠 그 자체를 향한 것을 숩스탄씨아, 즉 실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칠은 사람이다"라는 명제에서 '사람'은 다르게 되지 않는 유대칠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것이 실체입니다. 유대칠이 사람이란 서술 그리고 유대칠이 사람으로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은 그 자체로 참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대칠은 황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고 진술할 때는 유대칠이 사람이라는 선행 조건이 있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진술입니다. 유대칠은 결이의 아빠인 사람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유대칠은 사람이라는 선생 조건이 있지 않으면 결이의 아빠로 있는 사람이란 것은 독립해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유대칠에 대한 장소, 행위, 소유, 관계 등에 대한 서슬들은 모두 유대칠의 실체에 대한 서술인 "유대칠은 사람이다"라는 조건이 주어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지중해 연안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는 바로 실체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를 말합니다. 다른 모든 조건들이 실체라는 것으로 가능한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개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서술이며 그 이외 다른 서술들은 모두 그러한 실체에 대한 서술에 의존하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실체는 스스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우유는 실체의 덕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친구라는 사실, 내가 어디에 산다는 사실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진정한 본질은 그냥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나다운 곳은 내가 누군가의 친구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도 내가 어디에 사는가에 집중하는 것도 아닌 내가 사람이라는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고 결국 더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란 것도 결국 나라는 사람이기에 나는 나라는 나의 아집 속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사람은 이성적 동뭉이라고 하지만 사람이란 보편 개념은 감각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닌 관념 속 존재입니다. 만지고 같이 다투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은 지금 여기 현실 속 구체적인 개인으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이지 사람 그 자체를 만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결국 이성적 동물이란 보편으로 나를 서술하지만 결국 그 이성적 동물은 이성적 동물로 가장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나 자신입니다. 결국 나만이 이성적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의 밖 모든 것들은 저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할 수 있지만 나는 여기 생각하고 있다는 그 자신 하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 나의 생각과 나의 존재 속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판단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의지 혹은 욕심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이 세상은 나의 의지와 욕심으로 이끌립니다. 나는 나의 욕심 속에서 구속되어 존재합니다. "나는 사람이다." 결국 이 말은 그렇게 됩니다.
관계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같이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제자이고 누군가의 스승이며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남편이란 것은 나는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약합니다. 나는 사람이라는 말, 즉 결과적으로는 나의 욕심 속에서 만들어진 나에 대한 자기 긍정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누군가의 친구로 나는 그 친구 앞에서 나는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더 진실됩니다. 나는 누군가의 스승이란 것도 아버지이고 남편이란 것도 제자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만남의 자리에서 그것은 나는 사람이란 사실보다 더 살아이는 진실됨입니다. 우리의 삶도 누군가와의 만남, 그 만남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나의 누구 됨이 달라는 것은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요?
지중해 연안의 존재론은 여기 내가 있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서로 다른 다수의 나들이 서로 독립하여 있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나의 자유는 나의 본질에 핵심이며 나는 너 없이 존재 가능하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있음의 존재론은 관계와 공간 그리고 시간 등의 범주가 실체의 범주 만큼이나 소중한 진실된 사실이란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산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본질 밖이 아닌 나의 본질을 이루는 소중한 무엇이고 나와 관련된 이들과의 만남도 나의 본질을 이루는 소중한 무엇이며, 내가 누군가를 만난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불어 있다'는 것은 '만남'으로 있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며, 그렇게 수많은 인연, 즉 관계들이 더불어 있음으로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교회는 가톨릭교회라는 것도, 나의 교회는 개신교회라는 것도, 기존의 지중해 연안 존재론들은 결과적으로 그 술어에 주어가 지배당합니다. 그러면 그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회라는 말이 처음 역사 속에 뜻을 가지고 등장하던 시기, 여럿이 만나 더불어 이룬 그 뜻은 사라지고 보편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차가운 글귀가 주어를 지배하게 합니다. 차가운 관념 속에 현실의 존재가 들어가면 그 현실의 존재도 차가워집니다. 관념 속에서 타인의 종교를 비아냥 거리게 되고 조롱하게 되고, 관념 속, 시대의 아픔으로부터 등 돌린 자신의 종교만을 최고라 고집 피우게 되니다. 차가운 홀로 있음의 존재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죠. 오랜 시간 종교 전쟁도 이러한 존재론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있음의 존재론은 만남의 철학이며, 만남의 철학은 곧 대화의 철학이고 대화의 철학은 상호 주체성과 동시에 더불어 있음의 장이 됩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더불어 있음을 위한 조건이지만 홀로 있다는 사실 만으로 한 존재는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결국 뜻은 홀로 독방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됨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내어줌으로 가능하니 말입니다. 그라고 우리 됨 가운데 하나의 예술의 우리에게 뜻으로 다가오며, 하나의 행위는 도덕적 결단으로 다가오고, 하나의 정치적 선택은 제대로 된 역사적 판결을 받게 됩니다. 결국 지금 제가 하려는 더불어 있음의 존재론은 바로 그러한 더불어 있음의 신학과 더불어 있음의 미학 그리고 더불어 있음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위한 토대 작업이 될 것이며, 더불어 있음의 신학을 위한 토대작업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유대칠
2020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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