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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전태일을 부른다는 것 (전태일과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1. 18.

"그 참한 혼을 살려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전태일을 추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 추도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불사른 사람에게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그보다도 차라리 우리가 그를 살려내야 한다고 하고 싶다. 전태일을 살려라. 그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 우리가 그를 차마 죽은 채로 둘 수가 없다. 아니다. 전태일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다. 그는 그 죽음으로 우리 앞에 삶을 절규하고 있다. 그런 그를 어찌 차마 죽음 속에 묻어두고 썩혀둘 수가 있느냐? 전태일을 살려야 한다. 왜 우리는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나?

첫째, 그는 이 썩어지고 악독한 사회에서 참 드물게 보는 아까운 심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어려움을 잊고 남을 도와주기에만 바빴다. 그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는 불쌍한 어린 직공들을 도와주기 위해 밤늦도록 일을 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 시내에서 창동까지 그 먼 길을 걸어오는 일이 많았다 한다. 그나마도 신은 벗어 들고 맨발로 오곤 했다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 참한 마음을 어떻게 죽어 없어지도록 할 수 있겠나? 악하고 사나운 놈들만이 판을 치는 이 사회일수록 그 참한 혼을 살려내야 한다.

둘째, 그의 부르짖음이 지극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그의 외침이요 호소요 경고다. 생각해보라. 스물세 살의 젊은이가 죽고 싶어 죽었겠나? 안타까운 가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불길로 뽑은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이 사회의 적신호다. 그렇게 착하고 정의감이 강한 청년이 살아서 자기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불길로써만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이 사회는 어딘지 크게 잘못된 데가 있다. 사회의 밑둥, 생활의 근본 원리가 썩지 않고는 그런 처참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셋째, 그의 죽음이 나타내는 그것이 바로 세상을 건지는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제 목숨을 건지려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을 것이라”는 것이 이것이요, 공자의 “살신성인”이란 것이 이것이다. 인간 사회가 발전하고 정신이 자라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해 나를 바치는 이 정신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살려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전태일을 살려낼 수 있나?

첫째, 그가 남긴 뜻을 받아 행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인권의 유린을 당하고 자기 노동의 결과를 뺏기면서 아무 말도 못하는 불쌍한 직공들을 돕기 위해 몸과 마음을 썩히다 못해 몸을 불사르기까지 하고야 말았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남아 있는 사람의 의무다... 이제라도 우리가 그가 하려다가 못해 안타까워했던 그 일을 해야 한다. 노동운동을 일으켜라. 그는 살아날 것이다. 몸으로는 아니라도 몸보다도 더 높은 생명으로 살아난다.

둘째, 그가 가졌던 그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한다. 그가 “나 하나 죽어지면 뭔가 좀 달라지는 것이 있겠지” 했을 때 그의 확신이 어떠했던 것을 잘 말해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남이 감히 하지 못하는 그 영웅적인 일을 했다. 그 말 속에 그가 정의의 법칙을 꽉 믿었던 것이 들어 있다. 또 모든 사람의 속에 양심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살아나고야 말 것을 믿었다... 그는 또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믿었다. 전체를 믿은 것이다. 그 전체에 더 힘있게 살려고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믿음을 가져서만 전체 안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와 함께 행동함으로만 그를 살려낼 수 있다. 그의 일을 우리 일로 알아 거기 참여해야 한다. 전체의 삶을 우리 삶으로 알아 하나로 일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참으로 산다. 자란다...

태일이 죽은 것은 자기해방을 하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속에 절대의 의지가 명령을 하고 있는데 나갈 길이 막혔다. 어떻게 할까? 아니 나갈 수가 없고, 그 난관을 물리칠 힘은 없고, 거기 고민이 있다. 그러다가 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즉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냐? 내 몸 하나 때문이 아니냐? 이 몸 하나만 아니라면 내 대적이란 놈이 무엇을 가지고 나를 위협하고 막을 수 있나? 이것 하나만 벗어버리면 자유다. 막을 놈이 없다.

억지로 해서는 자기해방이 아니 되고, 오는 대로 받아서만 참 자아로 해방이 되어 무한한 생명에 들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도 그것이요, 간디의 죽음도 그것이다. 그들이 다 죽은 후에 살았을 때보다 더 크고 놀라운 영향을 주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은 있으나 태일의 죽음도 그 성격에서 마찬가지로 자기해방이다.... 태일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일종의 손가락 짜름이다. 수혈이다. 민족의 생기가 사라져 가기 때문에 된 일이다. 한 민족이 생기가 마르지 않고는, 스물세 살의 시퍼런 청년이 분신자살을 한다는 그런 모순된 일이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렇듯이 태일이도 민족의 숨이 막힌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숨구멍을 뚫어놓으려고 제 몸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근래에 우리 사회에 폭력과 부정부패가 느는 것은 민족의 생기가 줄어든 증거다. 태일의 죽음은 그 한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보고도 깨달음이 없다면 이 민족은 망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태일의 죽음은 참 의미에서 제물이다. 민족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친 제물이다. 원시 사회로부터 제사의 목적은 그 전체 사회의 생기를 부흥시키는 데 있다... 어느 사회나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곧 개체와 전체 사이에 불화로 막힌 것이 있다는 말이다. 사회가 바로 되려면 그것을 풀어야 한다. 푸닥거리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그 불화를 풀려면 언제나 제3의 인격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것이 예로부터 모든 사회에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는 이유다. 처음에는 짐승을 써서 상징적으로 했으나 나중에는 예수에게서 사실의 인격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태일이 노동자의 대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종래 자기를 불살랐다는 것은 역시 정부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전체와 노동자 사이의 막히고 맺힌 것을 풀기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친 것이라 할 것이다.

제3의 인격의 희생이 어떻게 그 막힌 둘 사이의 화해가 되느냐? 양심의 법칙에 의해서다. 사람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다 양심을 가지고 있다...이리해서 언제나 옳은 사람이 자진해서 하는 희생은 전체 사회의 정신을 소생시킨다. 새 생명을 일으킨다. 태일의 죽음도 그 한 예이다.

나는 지난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태일의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알았다. 그때의 내 슬픔은 참으로 컸다... 나라에 돌아올 때는 집도 말고 친구도 말고 우선 태일의 무덤으로 직행하고 싶었으나 정작 비행기에서 내리니 일이 그렇게 되지도 못했다. 오늘 이 자리만이라도 만들지 않고는 내 마음이 견딜 수 없었다. 한때 기념이나 하자는 것이 아니라 태일을 내 속에 살려보자는 것이다.

태일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하면서 몇 번이고 눈물을 못 금했다. 사실 내가 한일회담을 반대하며 싸웠을 때 전태일이만 해서 내 몸을 능히 불사를 만했더라면 나라꼴이 오늘같이 말이 아니 되지는 않았을는지 모른다. 사회에 좀 밝은 공기가 흘렀다면 스물세 살의 꽃 같은 생명이 희생되지 않고도 됐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나무랄 것이 있느냐. 태일을 죽인 것은 이 나지, 이 70이 되어서도 아직도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살 속에 갇혀 있는 이 나지."

 

전태일 열사 1주기(1970), 함석헌이 전태일을 이대로 죽게 둘 수 없다며 한 말입니다. 전태일의 마지막 말... "배고프다"는 말이 떠나지 않아 힘들다던 함석헌입니다. 태일을 죽인 것은 바로 우리라는 고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미 죄인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은 그 지식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힘을 가지고 머리 든 것 많고 하느님의 뜻을 안다며 하느님 향해 살라는 말로 자신의 침묵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상하고 고귀하다는 이들일수록 더 죄가 큽니다. 그 죄는 어찌하지 못해도 그 벌은 어찌할지... 무엇으로 그 벌을 다해야 할지... 다시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기억함이라 다시 부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부른다는 것은 그저 다시 불러 관념의 조각으로 두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너의 몸으로 이 시대의 부조리에 나의 몸은 그에게 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불사른 몸은 태일은 작은 몸으로 살지 않고 자유로이 모든 부조리의 공간마다 그 목숨으로 달려가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종교인들이 작은 예수니 말하면서 하늘보다 세상으로 고개 돌리고 살면 그것이 참 작은 예수 아니듯이 태일을 부른다는 것, 그것이 위선의 행동이 아니면 그 태일을 불러 이 몸을 적어도 부른 그 순간 내어 준다는 것입니다. 학자는 그 지식으로 어찌 권력이나 돈이나 가진 것을 더 누리거나 더 많이 누릴 것을 생각하지 말고 치열하게 그 지식으로 부조리와 싸우는 글이라도 죽어야 할 것이고, 종교인은 기도라면서 예배라면서 세상에 고개 돌리고 살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 임하도록 아프고 힘든 이 없이 모두가 더불어 행복한 이가 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더 높은 십자가 올린다고 그것이 어디 예수를 부르는 것일까요? 부처 따른다면서 그저 욕심 가득한 이야기를 고상하게 말하지 말고 정말 아집에서 벗어나 몸에 불 지르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석헌의 말 처럼 태일은 "참 자아로 해방이 되어 무한한 생명에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르면 됩니다. 그냥 머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온 정신 다하여 불러 그의 목숨과 더불어 이 부조리에 싸울 수 있다면, 이곳이 지금보다는 더 좋아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문익환이 쓴 '전태일'이란 시를 한번 읽어봅니다. 

"전태일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한국의 산악들아 강들아 들판들아 마을들아
한국의 소나무야 자작나무야 칡덩굴아 머루야 다래야
한국의 뻐꾸기야 까마귀야 비둘기야 까치야 참새야
한국의 다람쥐야 토끼야 노루야 호랑이야 곰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은 전태일이다 
 
백두에서 한라에서 불어오다가
휴전선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뒹구는
마파람아 높파람아
동해에서 서해에서 마주 불어오다가
태백산 줄기에서 만나 목놓아 우는
하늬바람아 샛바람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태일이다 
 
깊은 땅 속에서 슬픔처럼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들어야 알겠느냐
한국 땅에서 솟아나는 물방울치고
전태일 아닌 것이 있겠느냐 
 
가을만 되면 말라
아궁에도 못 들어가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희망처럼 눈물겨웁게 돋아나는
이 땅의 풀이파리들아
너희의 이름도 전태일이더냐
그야 물으나마나 전태일이다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너희의 이름이야 물론 전태일일 테지
여부가 있나
우리가 전태일이 아니면
누가 전태일이겠느냐
어찌 우리의 숨결뿐이겠느냐 
 
우리의 맥박도 야위어 병들어가는 살갗도
허파도 염통도 발바닥의 무좀도
햇빛 하나 안 드는 이 방도
천정도 벽도 마루도
삐걱거리는 층계도
똥 오줌이 넘쳐 냄새나는 변소도
미싱도 가위도 자도 바늘도 실도
바늘에 찔려 피나는 손가락도
아 깜깜한 절망도
그 절망에서 솟구치는 불길도
그 불길에서 쏟아지는 눈물도
그 눈물의 아우성 소리도
무엇 하나 전태일 아닌 것이 없다
전태일이 아닐 때 우리는 배신이다 죽음이다
우리는 살아도 전태일 죽어도 전태일이다 
 
빛고을 때아닌 총성이 요란하던 날
학생들 손에서 총을 빼앗아 들고 싸우다가
전사한 양아치들아
너희들도 당당한 전태일이었구나
먹을 것 마실 것 있는 대로 다 내어다가
아낌없이 나누어주면서
새신랑 맞는 처녀의 가슴으로
떨리기만 하던 티상들아
너희들도 청순하고 자랑스런 전태일이었구나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전태일은 이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 너의 이름, 나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함석헌의 말처럼 그를 죽게 두지 않고 정말 제대로 부른다면, 그렇게 그의 목숨이 죽지 않고 우리의 목숨이 되고 나와 너의 목숨이 된다면, 그리 되겠지요. 그러면 문익환의 말 처럼 우리의 목숨이 전태일이면 전태일 아닌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허접한 쓰레기들 다 치워지고 정말 제대로 우리가 우리가 되는 그 날,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학벌이라고 없는 그, 권력이 없는 그, 아는 것이라면 이 땅 부조리의 아픔이던 그, 어쩌면 정말 우리 사회의 희망은 바로 그 부조리의 아픔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 적어 봅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저의 다른 글들 속에서 다시 저 자신이 조금 덜 부끄러운 전태일이기 위해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유대칠 

2020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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