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lace de l'homme dans la nature는 우리말로 '자연 가운데 사람의 위치'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말로도 이미 번역된 비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작품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물음은 참으로 유명한 화두였기에 그보다 앞서 영국의 생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 역시 이 제목으로 1863년 책을 적었습니다. 바로 Evidence as to Man's Place in Nature입니다. 이 영어 제목과 조금 다르게 번역되지만 이 책의 불어 제목이 La Place de l'homme dans la nature이기도 합니다. 드 샤르댕 신부께서는 1950년에 적은 책입니다. 거의 100년 만에 같은 제목의 다른 책을 가톨릭의 예수회 사제가 적은 것이지요.
1863년 영어로 헉슬리가 책을 쓰고 1868년 불어로 번역되어 읽히게 됩니다. 왜 이런 주제로 책을 적었을까요. 바로 진화론의 등장입니다. 진화론은 당시 생물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 등에 큰 영향을 줍니다. <종의 기원>이란 다윈의 책과 과학적 증거들은 사람을 보는 시선을 다르게 하게 생물체를 보는 시선을 다르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란 종을 창조하였습니다.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가 사람이란 하나의 종 가운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란 종을 창조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이론적으로 중간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공룡은 멸종이라기보다는 소형 공룡들은 조류로 진화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시조새입니다. 시조새는 100% 조류도 아니고 100% 공룡도 아닙니다. 그 사이 중간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조류와 공룡을 창조하셨지 시조새와 같은 존재를 창조하진 않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나온 것이죠. 말 그대로 혼란입니다. 사람은 태초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작은 미생물에서 다양한 중간 존재들을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의 사람도 앞으로 더 진화하겠지요. 헉슬리는 생물학적 증거로 진화를 증명해 보입니다. 그런다면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 진화하려 만들어진 자연의 산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며, 그렇다면 사람을 보는 유일한 시선엔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지구가 세상을 중심이 아니라는 이름이 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더니 이젠 사람의 종도 하느님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다른 종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체적으로 진화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드 샤르댕 신부께서는 "지금 이 책은 사람이란 동물학적 무리의 구조와 진화적 방향을 알아보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라며 이 책을 시작합니다. 드 샤르댕 신부께서는 이미 진화를 인정해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진화와 관련된 인류 조상의 흔적을 발굴한 학자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진화라는 말을 꺼리는 우리에게 신부가 진접 진화를 인정하며 그 가운데 사람의 속성을 다루겠다는 것은 참으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드 샤르댕 신부께서는 그것은 우리의 진화에 대하여 다루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다른 길이 없다 확신하며 논의를 진행해갑니다. 그러면서 단언합니다.
"(사람이란) 겉으로 봐서는 그저 동물 세계의 한 '종'에 지나지 않으며, 영장류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단히 놀라온 생물학적 특성을 가진 것이 또 사람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의 종입니다. 영장류에서 나온 한 갈래 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 것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고유한 사람만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의 종, 자연 가운데 하나의 종, 영장류에서 나온 한 갈래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라는 거대한 생명 가운데 쉼 없이 새로움으로 향하여 자신의 끝을 넘어 자신을 부정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긍정해 가는 존재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뿐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작은 잡초 한 포기도 대단한 것입니다. 수 억 년 수 십억 년 우주의 역사가 지금 마지막 그곳에 모여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작은 풀 하나도 우주가 만들어낸 토양과 물 그리고 공기가 더불어 있어 드러난 것이 아닌가요. 대단한 신비입니다.
"사람은 생명세계의 한 부분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명세계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진화의 여정에 존재하는 한 부분입니다. 진화,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비입니다. 새로움을 향하여 만족하고 안주하고 아집에 빠져 있지 않고 쉼없이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는 생의 기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수많은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더 적절하게 더불어 있기 위해 구체적 생명체는 역사적 과거가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모양으로 변화하여 생명의 길을 쉬지 않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거대한 공룡이 지구에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있을 수 없을 때, 작은 공룡은 조류가 되고 그 새로운 자연환경에 따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 쉼 없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내어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개입하며 그렇게 삶을 이어갑니다. 연필을 많이 잡는 나의 손가락은 다른 손가락과 모양이 다릅니다. 연필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모습으로 손가락은 자신의 길을 잡은 것입니다.
헉슬리의 시대 많은 이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진화라니! 그러나 신학은 그것을 수용합니다. 과학의 발전에 고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진화의 신비 가운데 신앙의 초월을 읽어내며 하나가 됩니다. 진화의 세계 속에서 사람의 위치는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진화의 세계 자체가 신비이기에 그 가운데 사람, 오히려 다른 존재들보다 더 크게 이 지구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처지는 절대 초라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진화, 우리 신앙의 초월은 이어져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진화와 초월에 대한 드 샤르댕과 저의 생각을 한 동안 적어보겠습니다.
2020 12 02
유대칠 암브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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