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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바흐와 보에티우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1. 21.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오늘 우연히 너무나 익숙했던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 1068(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이다. 어딘가 한 번을 다 들은 곡이다. 

음악을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수학의 갈래에서 생각했다. 보에티우스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음악이라 보았다. 사실 음악은 매우 수학적이다. 그렇게 수학적 사유의 범주 아래에서 음악은 다루어진 것이 고대와 중세의 지중해 연안 사상가들의 생각이었다. 우주는 매우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다. 불규칙적이지 않고 매우 규칙적이다. 그 규칙성에 우린 달력을 만들기도 하고 하루를 헤아리기도 하며 친구와의 시간 약속을 잡기도 한다. 사람의 모든 시간 계산들과 헤아림은 모두가 천체라는 더 우주의 규칙성에 근거한다. 그 우주의 규칙성을 두고 보에티우스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음악이라 보았다. 마치 하나의 음악이 일정한 박자와 화음 속에서 그리고 음계라는 수학적 질서 속에 존재하듯이 그렇게 우주로 수학적 질서를 머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적 음악(Musica Mundana', 보에티우스는 저 밤하늘을 보며 우주적 음악이란 한 편의 거대한 교향곡을 감상한 셈이다. 사람도 한 편의 음악이다. 1도 화음을 위하여 서로 다른 음들은 조화를 이루며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화음은 더 이상 화음이 아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영혼도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도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너무 금육적이라 육체를 죄악으로 여겨도 안 될 것이고, 육체만을 강조하며 영혼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한 사람도 여러 감정과 영혼 그리고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할 그러한 존재,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도일 때 삼각형이듯이 그 가운데 하나의 각이라도 그 질서에서 어긋나면 삼각형이 유지되지 못하듯이 그렇게 조화와 질서 속에 있는 음악이다. 이를 '사람의 음악(Musica Humana)'이라 불렀다. 나는 한 편의 아름다운 곡인지 나를 돌아보며 살아가게 된다. 혹시 하나의 음계가 너무 두드러져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악기로 연주되는 수학적 질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음악이라 부르는 '악기의 음악(Musica Instrumentalis)'이다. 악기에 조화로운 소리들이 더해지면 그 소리들은 그냥 소리들이 아닌 음악이 된다.

우주는 신이 연주하는 거대한 음악이다. 사람은 신이 쓴 악보에 따라서 각자가 잘 연주해야 하는 음악이다. 음악, 악기로 연주되고 사람의 목소리로 울리는 그 음악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음악이다. 가장 온전한 음악은 사람의 귀엔 온갖 불협화음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거대한 질서와 조화 속에서 돌아가는 이 거대한 우주라는 교향곡이다. 그런 거대한 교향곡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 어렵다. 사람은  조화를 이루어내기도 힘겹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있므면 찬찬히 흐르는 음악, 그 조화 속에 반복되는 듯 흐르는 형태들은 더욱더 수학적인 무엇인가를 전하며 동시에 바흐라는 존재가 만든 하나의 작은 우주를 경험하게 해 준다. 비슷한 듯 흐르지만 다르고 다른 이어짐 그 조화 속에서 바흐는 듣고 있는 나의 영혼을 자신의 우주 속 그 질서의 선율을 타고 어느 순간엔 우주의 저 거대한 질서 속 한 조각이 된 듯이 느끼게 만든다.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 1068'은 거대한 주목으로 나의 영혼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은 소리로 부르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어떤 부름도 없이 내 영혼의 문을 녹여 버리고 어느 순간 나란 존재의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뜨리며 내 혼이 바흐의 우주에 녹아들게 한다. 아니, 그 조차 느끼지 못하게 흘러간다. '악기의 음악'이 나란 존재의 '사람의 음악'을 울리며 이끌더니 어느 순간 신의 음악인 저 '우주의 음악'의 한 울림으로 올라가게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돌아서니 앞선 보에티우스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음악은 나의 안과 나의 밖을 나누던 경계를 녹여 버리기도 한다. 어느 가사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느 슬픈 사랑이 나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울기도 한다. 어느 음악의 멜로디엔 나의 오랜 아픔들이 가사가 되어 나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 바흐의 음악은 나에게 그러했다. 

유대칠

202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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