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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권위(auctoritas)와 권력(potestas)을 생각하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0. 6.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육체는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 감각 기관으로 이런 저런 좋은 것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지각에 따라서 욕심이 생긴다. 맛난 것을 지각하고 그 좋음을 알게 되면 그것을 욕심내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입맛이란 것이 어느 정도의 교집합이 있으니 결국 좋은 음식 몇몇을 더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야 한다. 맛난 것을 더 많이 먹기 위해 말이다. 그런데 육체가 소멸되듯이 감각 기관의 기쁨이란 것도 있다 없어진다. 어느 순간 지루해진다. 곧 사라질 육체의 곧 사라질 감각적 기쁨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 참 슬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 역시 한 사람과 마찬가지다. 그저 감각적인 것만 추구하고 살아간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맛난 것 나 조금 더 먹기 위해 누군가는 덜 먹어야되는 것이 감각적 기쁨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차디찬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나라 역시 감각적 기쁨만을 생각하면 누군가는 아파하고 누군가를 즐기는 공동체로 나라가 되어질 수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말이다. 사람도 그러니 육체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있다. 영혼이 자신의 감각 기관의 기쁨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정당한가? 남을 힘들게 하면서 기쁘게 되는 이런 이기적인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 이성적 영혼을 따지고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민에서 나온 행위가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저 감각적인 기쁨만을 위해 나라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라의 권력을 그런 것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나라는 혹시나 그렇게 될지 모르기에 만든 공동체다. 혹시나 감각적 기쁨으로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싸울까봐 그것을 통제하면서 최대한 더 많은 이들이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만든 공동체일지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라'를 타락한 사람의 악습을 막기 위한 공간이 했다. 그럴 수 있다. 더 좋고 더 나쁜 것만 아는 사람은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나라가 있는 것이란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라의 권력, 현실 공간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그 나라의 권력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위는 감각적 기쁨에서 오지 않는다. 한 개인에겐 지성에게 오고 한 교회엔 하느님에게 오고 한 나라엔 민중들에서 온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기 위해 서로 다투지 말고 살기 위해 만든 것이 국가라면, 그 국가의 권력도 바로 그것을 위해 있어야 한다. 굳이 교회의 권력이라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 하나됨의 모습으로 있기 위한 한 교회 권력의 정당한 근거다. 그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면, 그 국민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그 권력이 행사될 때 그 권력은 권위를 가지게 된다. 한 사람의 천재성이나 한 사람의 핏줄이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의 권력, 그 권력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험을 잘치고 공부를 잘해서 권위가 주어진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물음이 아니다. 검사는 국민이 인정한 정부의 한 기관이다. 그리고 그 정부는 국민이 주관을 가지고 있다. 즉, 그 권력의 정당성, 그 권위는 국민에게 있다. 권위! 권력만 소리치고 그 권력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그저 싸움 잘 하는 동네 양아치가 될 수 있다. 항상 돌아보며 생각해야 한다. 내 권력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2019년 10월 6일

대구 계산성당과 대구 매일신문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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