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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9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0. 7.

2019년 9월 22일 일요일 오후 

 

사람은 그것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생물들의 땅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네. ‘대양도 나에게 그것이 없어’하고 바다도 ‘그것은 내 곁에 없어’한다네. 금 덩어리로도 얻을 수 없고 그 값은 은으로도 잴 수 없으며 오피르의 순금으로도 살 수 없고, 값진 마노나 청옥으로도 안 되네. 금과 유리도 그와 같을 수 없고, 진금 그릇들과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와 수정도 말할 나위 없으니 지혜의 값어치는 진주보다 더 하네. 에티오피아의 황옥도 그와 같을 수 없으며 순금으로도 그것을 살 수 없다네.” 욥기 28장 15-19절

 

하느님은 우리 사람처럼 욕심쟁이가 아니다. 더 좋고 화려한 것을 욕심내며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하느님 역시 욕심쟁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것을 가져다 바치면 그것이 좋아 더 화려하고 좋은 것을 내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즉 하느님도 거래의 대상이라 생각한다. 좋은 값을 내어놓으면 더 좋은 것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하느님은 그러한 분이실까? <욥기>에서 하느님은 아무리 대단하고 화려한 것이라도 지혜를 살 수 없다 한다. 하느님은 그러한 것으로 지혜를 파는 분이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장사꾼이 아니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그 지혜는 돈으론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 어느 곳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 지혜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지식과 같이 화려한 학력이나 엄청난 연구 없어도 지혜는 우리 일상의 공간에서 얻을 수 있다. 아프고 힘든 이들을 보자.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린 무엇을 보아야 할까? 그들의 무능함과 그들의 게으름을 보아야할까? 아니면 그들의 아픔을 우선 보아야 할까? 부당한 재산으로 잘 살아가는 이들의 그 못된 소유 앞에선 오히려 약한 소리를 내면서, 그들 앞에서 오히려 부러워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아픔 앞에선 그들의 게으름을 본다. 아프고 힘든 이들의 그 아픔 앞에서 그들을 굳이 도와줄 필요 없는 이유를 찾아내어 그 논리로 자신의 부덕함을 합리적으로 치장해 버린다. 도와주지 않는 자신을 합리적으로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면서 게으른 그들은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참 이기적이다. 지혜가 없다. 지혜란 아프고 힘든 이들의 옆에서 그들과 함께 우는 눈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혜는 잔머리가 아니다. 

 

‘사람은 그것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 사실 이 말은 그리스어 구약 성서인 <칠십인역> 성서에 준한 번역이다. 히브리어 구약 본문을 번역하면 ‘그것의 가치’가 된다. 그냥 이 둘 모두를 생각해도 좋겠다. 사람은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은 지혜의 가치를 알지도 못한다. 어쩌면 지혜의 가치가 쉽게 보이지 않아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돈’이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인다. 쉽게 보인다. 그래서 그것이 현실적인 참된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가치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된 지혜는 아니다. 참된 지혜를 그렇게 생각하면 그 지혜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고, 그 지혜에 이르는 길도 모르는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 이르지도 못한다. 

 

십자가 위 예수를 보자. 거기에서 보아야 할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다. 우선 보이는 것은 그저 처참한 모습의 한 남자다. 못 박힌 모습이 정말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잔혹한가 말이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예수의 사랑이다.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느님께서 철저하게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그 분이 굳이 이타적이지 않아도 그만인 그 분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 수난으로 아파하고 있으시다. 이타심, 사람, 너무나 슬픈 그 이타적 사랑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수난으로 예수는 불행한 것인가? 아니다. 예수는 지금 행복하다. 그 수난의 길에서도 그는 스스로를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으시며 자신에게 주어진 그 고통스러운 길을 행복하게 나아가신다. 그리 보면 참된 행복은 쉽지 않다. 철저하게 아프고 힘든 행복이다. 십자가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이다. 

 

그 행복에 이르는 방법, 그 지혜는 돈으로 얻어질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홀로 주머니에 숨기기 좋다. 자신의 것이라 손으로 잡고 고집하기 좋다. 그런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지혜는 구해질 수 없다. 지혜는 모든 눈에 보이는 값을 넘어선다. 그것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것을 사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 만일 지혜를 하느님에게 살 수 있다면, 그 지혜는 돈으로 산 이의 것이 된다. 그만의 것이 된다. 지혜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독점되지는 것이 아니다. 그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지상 어딘가 있어 집에 가져다 둘 수도 없고, 돈으로 구해 살 수도 없다. 

 

하느님은 욕심쟁이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좋고 화려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그것의 대가로 행복과 지혜를 파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위하여 모두에게 행복과 지혜를 내어주셨다. 하느님은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의 세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두가 모두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라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일부는 주인으로 일부는 노예로 창조하지도 않으셨다. 하느님은 그렇게 불평등한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으로 얻은 재물을 받아 기뻐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201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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