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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8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0. 6.

2019년 9월 29일 일요일 저녁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허무를 보았다. 어떤 사람이 동무도 없이 혼자 있다. 그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다. 그의 노고에는 끝이 없고 그의 눈은 부를 만족할 줄 모른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애쓰며 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마다하는가?’ 이 또한 허무요 불행한 일이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 자신들의 노고에 대하여 좋은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 준다. 그러나 외톨이가 넘어지면 그에게는 불행!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다. 또한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지지만 외톨이는 어떻게 따뜻해 질 수 있으랴? 누가 하나를 공격하면 둘이서 그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으로 꼬인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코헬렛 4장 7-12절  

 

산스크리트어로 ‘모크샤(moksa)’라는 말이 있다. ‘자유’란 말이다. 이 말은 ‘해방되다’ 혹은 ‘풀어지다’라는 동사 ‘무크(muc)’의 추상명사형이다. ‘자유’란 어딘가에 묶여있다 풀어짐이다. 맞는 말이다. 자유란 그러한 것이다. ‘모크샤’라는 말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다. 바로 ‘해탈(解脫)’이다. 해탈’도 자유다. ‘아집(我執, ātma-grāha)’으로 부터의 풀어짐이니 이 역시 자유다. 있지 않은 어떤 고정된 ‘나’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부터의 해탈, 분명 이것도 자유다. 

 

혼자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이는 남의 존재가 성가시다.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이 밉다. 혼자 가질 수 있는 것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더불어 있기’보다 ‘홀로 있기’가 좋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가족끼리도 죽으라 싸운다. 소유 때문에 말이다. 결국 동무도 없다. 자녀도 형제도 없다. 다가오면 싸운다. 더 많이 소유해야 하니 말이다. 결국 홀로 있을 수밖에 없다. ‘남’과 더불어 ‘우리’가 되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많이 소유해도 행복하지 않다. 누구 하나 넘어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넘어지면 그 때라면 자신을 지나쳐 더 많이 가져간다. 넘어진 자신의 아픔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그 마음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아프고 힘들어도 보는 이가 없다. 홀로 누린 시간의 깊이 보다 더 깊게 홀로 아파한다. 누구도 그의 아픔을 보지 않는다. 더불어 있으려 하지 않는다. 참 허무하다. 열심히 죽으라 싸우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누구에게도 무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기 주변 누구에게서도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는 이도 없고 자신의 눈물에 함께 하는 이도 없다. 그래도 쌓아둔 소유물이 많으면 그만이라며 비싼 음식을 사서 혼자 먹으며 웃는다. 홀로 웃는다. 누구 하나 진심으로 더불어 웃어 주지 않고 말이다. 그저 다가오는 이들은 싸우려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소유를 이용하려는 이들 뿐이다. 철저한 홀로 있음이다. 

 

따스하게 서로의 품을 느끼며 안아줄 이, 하나 없다. 허무하다. 살아 있지만 그 삶의 뜻은 무엇인가 싶다.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그것이 허무다. 허무. 더불어 있으라 하신다. 추운 겨울 서로의 따스한 체온을 나누라 하신다. 넘어지고 억울해 하면 더불어 일어나고 싸우라 하신다. 그 더불어 있음에 하느님은 행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다. 정말 뜻 있는 삶이다. 아집에 끌려 다니는 삶에서 벗어나 해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 아집에서 벗어나 더불어 있어야 한다. 나만이 좋은 삶, 나만의 부를 찾아 부의 노비가 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불어 말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 자유도 어쩌면 해탈이 아닐까 싶다. 해탈하자. 그리고 더불어 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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