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댕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1916년,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길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현대 정신의 화해입니다. 새로운 의미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의 조화입니다. 결론적으로 '진화'와 '초월'의 조화입니다. 오랜 시간 초월이란, 종교적 신앙이란 하늘만 바라 보았지만 정말 저 눈에 보이는 하늘의 소중을 보진 못했습니다. 그저 이 현실을 벗어난 무엇인가를 할 뿐이었습니다. 창세기, 하느님 조차 아름답다한 이 우주를 모르는 신앙, 요한복음서,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 부터나서 살아간다는 우리외 같은 핏줄인 우주를 모르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현실과 거리두기는 샤르댕의 시대 더욱더 커집니다. 바라 진화의 문제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화라는 생물학적 상식은 거부했습니다. 이런 상화에서 그는 이 거대하고 웅장한 우주에 대한 합리적인 정열의 사랑, 즉 이성과 신앙인으로 천국을 향한 초월 신앙의 조화를 궁리하였습니다. 사회교리는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시선이라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향한 시선이라면, 여전히 과학적 성과에 대힌 과거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를 그는 벗어나야한다 생각 했습니다. 어찌보면 신앙의 진화를 통해 참다운 초월을 이룰수있다 본 것이지요. 그는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구원에서 자연을 배제한 구원관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하나됨 흑은 우주와 하나됨을 하나의 틀 속에 두고자했습니다. 그래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이제 신앙이 창조의 한핏줄인 우주 만물을 바라봐야한다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세상 모두는 말씀으로 창조된 한핏줄이니 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인 신앙과 우주에 대한 사랑인 과학 혹은 철학이 경쟁이 아닌 하나로 만나야하면 그럴 책임이 있다 그 자신은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나누어짐을 해결할때 올바른 구원과 신앙에 이르게되고 균형잡히 종교적 내적 생활을 이루게 된다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우주를 향한 사랑, 이 두 사랑의 조화, 이러한 떨어질 수 없는 양면의 사랑이 하나의 참 사랑임을 깨우쳐야한다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의 신학이 이루어야할 과제라 확신했습니다. 저기 죽어가는 우주의 생명 앞에서 그저 하늘만 비라보는 신앙은 안될 말입니다. 저 밤하늘의 아름다움과 작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작디작은 생명과 하나되지 못하는 신앙은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우주 사랑의 조화, 그 두 사랑의 조화, 지금도 쉽지 않은 길을 그는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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