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에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느님을 마주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느님이셨습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2. 그분은 처음에 하느님을 마주해 계셨습니다.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3.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있게 되었고, 있게 된 것 가운데 하나도 그 없이 있지 않습니다.
πάντα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4. 그 가운데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ἐν αὐτῷ ζωὴ ἦν, καὶ ἡ ζωὴ ἦν τὸ φῶς τῶν ἀνθρώπων·
5. 그리고 빛은 어둠 가운데 밝혔지만, 어둠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καὶ τὸ φῶς ἐν τῇ σκοτίᾳ φαίνει, καὶ ἡ σκοτί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유대칠 옮김)
<필리피 신자에게 보낸 서간> 4장 6절을 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에서나 기도와 간구로써 감사하며 여러분의 요청을 하느님께 알리시오."
μηδὲν μεριμνᾶτε, ἀλλʼ ἐν παντὶ τῇ προσευχῇ καὶ τῇ δεήσει μετʼ εὐχαριστίας τὰ αἰτήματα ὑμῶν γνωριζέσθω πρὸς τὸν θεόν·
이 구절에 πρὸς τὸν θεόν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가 헬라어 신약 성서를 보니 <요한 복음서> 1장 1절과 2절 그리고 <필리피 신자에게 보낸 서간>에 이 헬라어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엔 '하느님과 함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라틴말로 apud Deum라고 되어 있는데 라틴어 번역은 우리말 번역과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곁에 있다는 말로 읽힙니다. 라틴어 전치사 apud은 ~ 옆에, ~의 곁에, ~ 근처에라는 말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헬라 말 πρὸς 는 사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 뜻은 ~ 에게로, ~을 향하여라는 말입니다. 저는 '마주해'라고 옮겼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람의 말로는 온전히 표현되지 못합니다. 양자역학은 수학으로 계산이 되어도 사실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그 신비한 물리의 법칙을 나타내는 사람의 경험이 없고 개념이 없고 말이 없어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수학적 계산으로 이것이 되는구나 알아듣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냥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우주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단지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히 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물며 삼위일체의 신비는 더 할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다 드러낼 사람의 말은 없고 개념과 경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왜 함께라는 말이 아니라, 헬라 말로 이렇게 1절과 2절에 연이어 두 번이나 ~향하여 혹은 ~에게로라는 의미의 전치를 사용했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마주 봅니다. 그렇게 마주 본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아픔과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남이지만 누군가 아픈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 아픔이 조금은 나에게 전해집니다. 그대로는 아니지요. 나는 그의 몸이 느끼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몸이 없는 태초의 성부와 성자께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함으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마주함으로 서로가 서로와 더불어 있음으로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이렇게 표현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필리피 신자에게 보낸 서간>가 같이 하느님을 마주 보고 하느님을 향하여 요청하는 존재이지만, 어쩌면 정말 제대로 하느님과 마주하고 있다면 우리의 입보다 우리의 손짓 발짓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있으실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분의 존재밖에 버려진 존재가 아닌 그런 존재임을 사실 하느님은 대초부터 우리를 마주 보고 더불어 있어 아시지만 우린 하느님을 마주하고 있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딴생각을 하며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이 땅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자께서 직접 감은 눈을 뜨라고 오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말씀은 처름부터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에게로 있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사랑, 마주 보며 더불어 있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채운다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양반이 노비를 지적하듯이,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조선사람을 지적하듯이, 독재시대 독재자가 민중을 지적하듯이, 그렇게 우린 지적질에 익숙해 서로 마주 보면 나와 다른 점을 찾아 지적하고 조롱합니다. 자신 역시 완전하지 않는데 누군가의 완전하지 못함을 두고 조롱하고 웃으며 그것을 함께 하는 것을 사회생활이라 합니다. 참 슬프지요. 마주 봄은 지적질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아픔과 기쁨과 더불어 있기 위해서입니다. 노숙자와 더불어 있는 이는 그가 왜 이렇게 가난했는지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의 아픔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픔이 손수건이 되고 따스한 밥 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지적질하는 모습,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아이를 자신들의 기준에 지적질하고, 자신도 누군가의 지적질을 당할까 염려하게 합니다. 마주하며, 그의 아픔을 위한 손수건이 되어 그의 기쁨에 웃음이 되어 머무는 것, 바로 그것이 더불어 있는 것이며, 하느님과 말씀의 더불어 있음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외로움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외로움뿐인 사람에게 타인은 무거운 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으로부터 들은 것도 지적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는 그저 혼자 외롭고 힘들고, 인정받기 위해선 공부라는 싸움으로 이겨야 하고 취업이란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참 외로운 세상이지요. 가족도 서로 더불어 살지 못한 세상을 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많은 경우는 부모의 이와 같은 의도하지 않은 정서적 학대가 큰 짐이 되고 병이 되어 있습니다. 참 슬프지요. 남의 시선이 자신을 지배하니 남이 주는 관심과 배려도 짐이고 그저 적을 만들어 싸울 생각이 가득하게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성당이나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며, 서로가 서로의 아픔이 되고 기쁨이 되어 일치를 이루는 그 삶으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그러한 신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요한 복음서를 읽으며 저는 저의 더불어 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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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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