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에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느님을 마주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느님이셨습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2. 그분은 처음에 하느님을 마주해 계셨습니다.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3.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있게 되었고, 있게 된 것 가운데 하나도 그 없이 있지 않습니다.
πάντα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4. 그 가운데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ἐν αὐτῷ ζωὴ ἦν, καὶ ἡ ζωὴ ἦν τὸ φῶς τῶν ἀνθρώπων·
5. 그리고 빛은 어둠 가운데 밝혔지만, 어둠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καὶ τὸ φῶς ἐν τῇ σκοτίᾳ φαίνει, καὶ ἡ σκοτί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유대칠 옮김)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있습니다. 그 없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말씀으로 인하여 있게 되었고 말씀으로 인하여 살아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 앞 작은 그 무엇도 말씀밖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우리 존재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고향 가운데 있지만 고향에 있음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 고향에서 나서 그 고향에서 살지만 어디에서 나서 어디에서 살아가는지 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으로부터 나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존재하는 것의 운명입니다. 우주는 창조로 인하여 태어나 진화로 나아갑니다. 그 진화의 끝엔 우주의 마지막이 있겠지요. 창조로 인해 말씀에서 나서 우주의 마지막엔 말씀으로 돌아가겠지요. 무경계의 존재에서 서로 경계를 가지고 살아가며 저마다 자신만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 순간엔 무경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요. 나와 너의 경계가 무너지고 너도 나이고 나도 너인 그러한 모습으로 돌아가겠지요. 말씀이 하느님을 마주하며 무경계의 경계로 있으셨듯이 그렇게 우리의 모습도 우리 서로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 역시 무경계의 경계로 다아갈 것입니다.
진화는 적자생존의 방식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더불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살아남음입니다. 작디작은 쥐와 같은 존재가 큰 호랑이가 되고 사자가 되고 사람이 된 것은 약한 것을 죽이거 살아남은 이가 살아남음을 누려서가 아니라, 어느 쥐가 자신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는 꼬리뼈가 줄어들듯이 우주 전체에서 더불어 있음에 어울리지 않게 홀로 있으려는 것들은 줄어들겠지요. 홀로 있음이 우주의 본질이 아니라, 더불어 있음이 우주의 본질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우린 참 위험한 존재입니다. 더불어 있지 않고 파괴하며 살아가니 말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며 다이아몬드를 얻어 그것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가난한 수많은 나라의 노동력을 앗아가 그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것을 괴롭히며 웃고 살아갑니다. 사람 사이도 이러한데 다른 존재들에 대해선 얼마나 가혹할까요? 사람을 위해 수많은 자연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그 자연 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망각하고 자신의 더불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며 스스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세상은 말씀으로 인하여 생겨 말씀으로 살아가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인하여 만들어져 사람에게 사용되는 세상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상은 모두가 하느님의 품에 있는 공존의 세상이지만, 사람의 세상은 사용하는 것과 사용되는 것의 치열한 다툼의 공간입니다. 더불어 있음의 세계와 홀로 있음의 세계로 나누어진다고 할까요.
하느님으로 인하여 존재하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존재론적인 한 형제자매입니다. 평등입니다. 사람사이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모두가 형제자매입니다. 사용자와 사용되는 것의 관계가 아닙니다. 작은 풀 한 포기의 기쁨과 아픔을 아는 세상, 어쩌면 그 세상에선 그 작은 풀 한 포기 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마주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그러한 세상, 하느님을 일상 속에서 만나며 고마워하는 그러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풀 한포기와 나의 무경계의 경계를 경험하는 세상,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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