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에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느님을 마주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느님이셨습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2. 그분은 처음에 하느님을 마주해 계셨습니다.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3. 모든 것이 그로 인해 있게 되었고, 있게 된 것 가운데 하나도 그 없이 있지 않습니다.
πάντα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4. 그 가운데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ἐν αὐτῷ ζωὴ ἦν, καὶ ἡ ζωὴ ἦν τὸ φῶς τῶν ἀνθρώπων·
5. 그리고 빛은 어둠 가운데 밝혔지만, 어둠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καὶ τὸ φῶς ἐν τῇ σκοτίᾳ φαίνει, καὶ ἡ σκοτί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유대칠 옮김)
살아있는 것뿐 아니라, 살아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으로 인하여 있고 말씀과 더불어 있습니다. 말씀 없이는 없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산 이에게 생명입니다. 더 크게 보면 그 말씀이 바로 존재 그 자체입니다. 돌 하나도 그 가운데 있음이 있습니다. 그 있음이 그대로 신비입니다.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그뿐인가요. 살아있는 모든 것의 있음, 즉 그 생명, 그 목숨이 바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거기 힘없이 박 한 그릇의 차례를 위해 전염병이 유행하는 시대에 줄을 서있는 노숙자의 목숨도 병이 걸려도 많은 돈으로 어렵지 않게 치료하는 부유한 이의 목숨도 모두가 성스럽고 소중합니다.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뜻입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창조된 소중한 목숨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가 더불어 사는 소중함을 모르기에 그 신성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제대로 하느님의 뜻이 우리 목숨으로 드러난다면, 나누어짐은 없습니다. 흩어짐은 없습니다. 그 힘겨운 목숨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러면 말씀을 따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면, 우리의 생명은 힘 없이 아픈 이들의 목숨에도 잘못을 잘못으로 모르며 거짓이라도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마귀가 되려는 이들의 목숨에도 희망이 됩니다. 이 땅, 예수의 손과 말이 되어 다가가 그들의 외로운 홀로 아픔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내어줌으로 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것이 우주의 원리임을, 그것이 이 우주의 참모습임을 보이셨습니다. 그 보이심을 따라 그것에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따라 사는 이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린 우리의 아집에서 벗어나는 초월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화입니다. 우린 진화해야 합니다. 신앙의 진화는 아집을 초월하여 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그리고 자연 모두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초월은 이 현실을 벗어나 죽은 이들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치열하게 궁리하며 살아있는 생명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살기 위한 초월이지 죽기 위한 초월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홀로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아 하느님을 찾으며 눈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홀로 있음을 벗어나 더불어 있으러 달려 나가야 합니다. 초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으로! 역동성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저 당신 하나의 목숨이 아니라, 더불어 모두의 목숨을 위해 자기를 내어 놓으며 부활하신 것을 통하여 우린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의 목숨만 보고 그 홀로 있음만을 부여잡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 이룰 것은 그저 수많은 홀로 있음의 외로운 다툼과 아픔뿐입니다. 여럿의 빛이 되기 위해 나의 아집을 장막을 버려야 합니다. 그때 내 안의 빛, 내 목숨의 빛, 더불어 있음의 그 빛이 여럿의 빛이 되어 타오릅니다.
나의 아집을 태우면 나는 그 태움으로 빛이 되고, 결국, 나는 나홀로의 아집에서 벗어나 더불어의 희망으로 여럿의 빛이 됩니다. 예수 안에,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 그 목숨에 정말 제대로 한몫을 하여 살아있다면, 목숨을 받았다면, 그것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 삶을 산다면, 진화해야 합니다. 초월해야 합니다. 더 역동적으로 더 나온 곳을 향해 진화해야 합니다. 자기 아집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초월해야 합니다. 진화는 초월입니다. 그 진화와 초월로 나의 밖 수많은 목숨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집이 무너지면 자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게 될 때.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되고 빛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가면 자연히 그분과 다시 한번 더 단단하게 우리로 더불어 있게 되겠지요.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더욱더 단단하게 우리로 더불어 있을 때, ㅇ리 태초의 그 순간처럼 다시 우리의 마지막에 서야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 존재하게 되겠지요.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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