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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고난은 거짓을 지우고 참을 드러냅니다. (더불어 신학의 야고보서 읽기 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1. 1. 7.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싸일 때에 여러분은 그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시오.

3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여러분의 신앙의 시험은 인내를 길러 줍니다.

4 아무쪼록 이 인내력이 완전한 업적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의 편지 1장 1-4절)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사람입니다. 물론 그 행복의 모양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가진 것도 많지 않지만 그 얼마 되지 않은 것도 나누며 행복을 누리는 분도 있습니다. 잔혹한 자본주의, 돈이면 조금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조금 바보 같은 사람들이죠. 이와 달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 사는 이유는 그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누군가는 가진 것이 더 줄어들어도 행복한 이가 있고, 또 누군가는 가진 것이 더 많아져도 여전히 덜 행복하다며 더 행복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이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더 가지고 더 누리고 누리면 더 행복하다 믿는 이들이 조금 더 많아 보입니다. 그들은 그런 삶이 주는 행복을 믿습니다. 그들에겐 하나의 신앙입니다. 더 가져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살아가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렇게만 살아야 행복합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더 비싼 집에 사는 것이 행복하기보다는 더 비싼 집에 살면 더 싼 집에 사는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너는 나보다 더 가난해! 이 말은 돌려 돌려 말하곤 돌아오는 부러움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스스로 홀로 기뻐하기보다는 자랑할 곳을 찾고 그 앞에서 자랑하며 덜 가진 이들에게 부러움을 얻는 것으로 행복으로 누리려 합니다. 그 행복은 덜 가진 이의 부러움에서 얻어집니다. 스스로 행복하기보다는, 남의 불행과 가난 등에서 얻어집니다. 참 못된 행복입니다. 그 못된 행복은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 앞에선 불행하다 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스스로 있는 행복이 아니라, 남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행복이기에 남의 시선이 달라지면 그 행복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불행이 되어 버립니다. 과연 참된 행복은 어떠한 행복일까요? <야보고의 편집>는 힘겨운 시절 저에게 행복이 무엇이지 고민하게 해 준 고마운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게 얻은 참된 행복을 먼저 말해볼까요?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고난 속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1장 12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앞으로 <야고보의 편지>를 읽어가며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그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이들을 행복할 수 없습니다. (1장 22절) 듣기만 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것은 복음을 따르는 이가 아닙니다. 예배의 설교와 미사의 강론을 아무리 들어도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예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따르는 이가 아닙니다. 이웃을 나의 몸처럼, 즉 스스로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이는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행복으로 누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가난과 아픔을 남의 가난이나 아픔으로 여기지 않고 그 가난과 아픔의 옆에서 그 눈물과 더불어 울고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영하 20도에서 생활하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 이를 보세요.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혹시나 나 역시 돈 욕심이 누군가를 수단으로만 여긴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자기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그의 아픔과 힘겨움을 그저 남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정말 그가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는 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 누군가의 앞에서 자랑한다면, 그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 자신보다 가난한 이를 자기 행복의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죽이지 않았지만 때리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자신과 같은 인격 대 인격으로 마주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흔한 일인지요. 이웃을 스스로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말,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살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알고 있는 그 복음의 말씀 대로 살려면 힘듭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자기 아집으로 살아가면 될 것인데, 이기심을 따라 살면 될 것인데, 자꾸 돌아보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힘겹습니다. 홀로 앞서 더 강해지고 더 부유해지기도 바쁜데, 이웃을 스스로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이 남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이 되고 생각이 되고 그렇게 하나가 되려면 나의 아집은 쉼 없이 부서져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음이 바로 신앙입니다. 시련, 그 고난은 기쁨입니다. 그 고난으로 힘들다면, 지금 양심의 외침에,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아집이 부서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거짓이 지워지고 참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삶도 역사도 고난은 거짓을 지우고 참을 드러냅니다. 

조선을 보세요. 양반들이 그렇게 고상한 담론으로 백성을 사랑한다 하였지만,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에 가장  먼저 달아난 이들이 양반이고,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일본에 남긴 이들도 양반입니다. 그들이 정말 백성을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백정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보세요. 천민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보세요. 동학이 그들을 안아주었을 때, 동학을 이단이라 죽였고, 서학이 그들을 알아주었을 때, 서학을 이단이라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정통은 신분의 위계에 의하여 항상 자신만이 행복한 그런 조선이었습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으로 사회를 나누고 아랫사람의 아픔은 그들에겐 남의 아픔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그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우린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양반들의 고상한 논리는 헛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충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들 대부분의 친일파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난의 시기, 양반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아집과 이기심이 승자로 보이던 그 시기, 우리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없는 집안 소녀들은 일본군에게 위안부로 끌려가고 없는 집안 소년들은 일본군으로 강제로 끌려가 남의 나라 전쟁에 죽어갔습니다. 심지어 종교 조차 이 땅 민중의 울음의 옆에 있기보다 양반과 같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같이 강자의 편에서 강자가 주는 편의를 누리며 있었습니다. 그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독재의 시기를 걸치면서 우린 거짓이 무엇인지 참이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아집과 이기심은 거짓이었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논리라도 결국은 거짓이며, 자기 기득권을 위한 듣기 좋은 자화자찬의 논리일 뿐이었습니다. 참은 없지만 힘들지만 이겨낸 이 땅의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의 편에선 철학이 참이었고, 그들의 편에선 종교가 참이었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시오" (야보고의 편지 1장 9절)

<야고보의 편지> 1장 9절의 말씀은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낮아지는 길, 그 길이 진짜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소유가 아닌 나눔의 공유이고, 홀로가 아닌 더불어가 행복의 길입니다.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 힘들지만 독립자금을 마련한 이들이 어디 쉬운 삶을 살았을까요? 힘들지만 거짓과 싸운 이들이 어디 쉬운 삶을 살았을까요? 가난하게 살라는 말, 그것을 가진 것을 버리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아프고 힘든 이들과 더불어 공유하라는 말로 들어야할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감, 그저 아집과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그러나 기뻐하세요. 진짜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진짜로 행복하게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1 07

 

노숙자 예수의 발 유대칠 (C)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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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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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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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철학사 - 교보문고

이 책은 이 땅에서 우리말 우리글로 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우리 삶과 고난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한국철학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변방에서 중국을 그리워하며 한자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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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모독자 - 교보문고

중세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성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철학자 13인이 일으킨 파문과 모독의 일대기를 다룬 『신성한 모독자』. 중세에서 이단이란 그리스도교 외부에 있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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