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러분 사이에 다툼이 어디에서 생기며 싸움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쾌락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탐내어도 가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살인하고 질투해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싸우고 다투는군요. 가지지 못하는 것은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해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쾌락에 낭비하려고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
4 간음하는 자들! 세속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줄 모릅니까? 사실 세속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자는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5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신 얼을 질투할 만큼 그리워하신다 는 성경의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분이 주시는 은총은 더욱더 큽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고 합니다.
(<야고보의 편지> 4장 1-6절)
왜 사람은 서로 다투고 갈등하게 될까요? 갈등하고 서로 싸우는 어느 편에도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편이 되어 저 편을 죽이고, 저 편이 되어 이 편을 죽는 하느님이라면 참 하느님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의 하느님이시지 전쟁과 다툼 그리고 분열의 하느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도를 무시하고 불교도를 무시하고 힌두교도를 무시한다고 좋아하실 하느님은 분명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린 참으로 쉽게 다투고 갈라집니다.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서로를 악마로 여기고 무시하고 오답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만 천사이고 존중받아야 하며 정답이라 고집 피웁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하느님이 되어달라 청하고, 자신이 아닌 이들을 잔혹하게 벌주라 기도합니다. 참 잔인하고 못된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간절히 청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쾌락과 아집을 위한 기도에만 간절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 정말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고 서로를 향한 무시가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선 볼 수 없고 이기심의 나라, 홀로 있음의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더불어 있음의 나라입니다. 그 더불어 있음의 나라에선 교만으로 가득한 이도 없으며, 홀로 더 많이 가지겠다 욕심 내는 이도 없습니다. 높게 서서 남에게 함부로 명령할까 조심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나라이고, 홀로 더 많이 가질까 두려운 마음에 더불어 나누어 가지려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바로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교만을 물리치고 아집을 버리고 홀로 있지 않겠다는 각오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각오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냥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각오하고 애쓰는 기도여야 합니다. 어떤 애씀도 없는 각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 각오가 현실로 드러나려는 애씀을 만날 때 더불어 있음을 향한 기도는 이루어지겠지요. 당연히 말입니다. 분열은 없어지겠지요. 당연히 말입니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툴 것은 하나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서로 다른 길이지만 결국 하느님을 향한 길입니다. 다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더불어 애써야 할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확실하게 천국에 간다고 교만하거나 누가 더 하느님의 자식이라 교만하거나 나만이 정답이라 교만한다면, 더불어 삶을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가지도 하느님이 오지 않는 그런 홀로 있음의 자리에 서게 될 뿐입니다. 교만이 하느님을 향한 나아가는 길을 막고, 하느님과 더불어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멀어지게 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라도 서로 다른 사상과 서로 다른 가치관이라도 나만이 홀로 정답이란 생각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희망이 되는 더불어 있음의 공간이 이 땅에 이루어질 참 하느님의 나라라 생각해 봅니다. 혹시나 내 이기심만 생각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홀로 있음의 나라, 그 지옥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혹시 내 답만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그 독단 속에 남을 오답이라 생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더불어 있음의 기도가 있는 곳에 더불어 있음으로 이미 내려온 하느님의 나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그 하느님의 나라에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이기심의 기도에 집중하며 아쉬워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돌아봅니다. 그리고 오늘도 참 부끄럽습니다. 사람은 왜 서로 싸우고 갈등할까요? 어쩌면 나 하나의 이기심도 이유일지 모릅니다. 나의 홀로 있음이 이유일지 모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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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 서점'과 '예스 24' 그리고 '교보' 사이트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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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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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대한민국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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