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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2호실

인도의 철학 1장 인도의 철학 강의를 위한 서론 (유대칠의 슬기네집 대구독서논술, 성인, 초중고, 독서글쓰기교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4. 3. 16.

인도의 철학
: 유대칠이 쓴 강의록

유대칠 (한국현대사상연구소)

[2002년 인도의 철학 강의록을 토대로 지금 유대칠의 어투로 수정하여 공유함]

1장 인도의 철학 강의를 위한 서론

철학은 보편적이지만 개체적 지혜일 때 살아있는 힘을 가진다. 그저 보편적이기만 한 것은 구체적인 삶에서 때론 그저 뻔한 이야기이고, 때론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철학은 보편적이지만 그 철학이 등장하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개체적 지혜로 살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편 역시 무시할 순 없다. 철학의 보편성은 철학이 궁리하는 그 물음에서 구할 수 있다. 언제 어느 때의 철학도, 어느 곳의 철학도, 모두 “어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가”를 궁리한다. 고대 철학도,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철학도 모두 이 문제를 보편적으로 궁리한다. 유럽의 철학도 아랍의 철학도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철학도 모두 이 문제를 보편적으로 궁리한다. 이렇게 “어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가”라는 보편적 물음은 모든 철학을 철학으로 불리고 철학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종의 보편적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 보편적 물음에 대한 답은 구체적 상황마다 다르다. 고대 헬라스 철학은 고대 헬라스라는 구체적 조건 속에서 보편적 물음에 답을 한 보편적이지만 개체적 지혜를 담은 철학이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철학 역시 고대 동북아시아라는 구체적 조건 속에서 보편적 물음에 답을 한 보편적이지만 개체적 지혜로 이루어진 철학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도철학 역시 인도라는 구체적 조건 속에서 보편적 물음에 답을 한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각각의 철학은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각각의 조건 속에서 뜻을 품은 지혜다. 어느 지혜가 더 탁월하다거나 더 합리적이란 식의 비교 자체도 사실 그 철학이 태어나고 살아간 조건 자체가 서로 다르기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철학이 자기 철학만이 보편적 질문이 가장 보편적인 합리성을 가진 가장 보편적인 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유럽의 철학만이 “어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가”라는 보편적 물음에 가장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즉 유럽 철학만이 가장 보편적으로 묻고 가장 보편적으로 답한다고 주장한다면, 유럽 아닌 다른 구체적 조건 속에서 철학 한 이들의 철학은 살해당하는 꼴이 된다. 분명 서로 다른 조건에서 서로 다른 합리의 조건에서 애써 만든 답인데 어느 하나만 보편적이라 주장한다면, 다른 개체적 지혜는 철저히 살해당한 꼴이 되니 말이다. 인도의 철학도 유럽의 철학도 서로 비교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태어나고 살아간 개체적 철학이다. 지금 비록 헬라스어나 라틴어 ‘philosophia(필로소피아)’로 불리는 우리 생각의 애씀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도 저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가”라는 보편의 물음을 마주하게 되고, 그 마주함 앞에서 자기 자리에서 개체적 답을 마련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에서 유럽의 철학만이 철학인 건 아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불교에 익숙하다. 나 역시 불교 사찰을 즐겨 다닌다. 굳이 불자가 아니라도 나는 불교 사찰을 즐겨 찾고 불교의 오랜 고전을 즐겨 읽는다. 그렇다고 불교를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전공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 아주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불교가 시작된 인도, 그리고 불교의 지혜가 잉태된 인도의 철학은 생각보다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Siddhartha Gautama, 실달다 교달마(悉達多 喬達摩), 기원 전6~5세기?), 바르다마나(Vardhamana, 대웅(大雄), 기원 전6~5세기),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 150?∼250?), 아르야데와(Aryadeva, 제바(提婆), 170?~270?), 바수반두(Vasubandhu, 세친(世親), 316?~396?), 짠드라끼르띠(Candrakirti, 월칭(月称), 600?~650?), 디그나가(Dignaga, 진나(陳那), 480?~540?), 다르마끼르띠(Dharmakirti, 법칭(法稱),600?~669?), 다르모따라(Dharmottara, 법상(法上), 730?~800?), 꾸마리라 브하따 (Kumarila Bhatta, 700년대?), 쁘라브하까라(Prabhakara, 500~600년대?), 강게샤(Gangesa, 1300년대?), 라마누자 (Ramanuja, 1017?~1137?) 등과 같은 철학자들의 철학이 가득한 철학이 바로 인도의 철학이다. 정확하게는 지금의 인도와 그 주변 여러 나라의 철학이다. 이들 모두 각자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생각의 애씀이다. 그리고 하나 같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보편의 물음에 응답했다. 앞으로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들의 바로 그 응답이다. 이들의 보편적이고 개체적 지혜 말이다.

우리가 ‘철학(哲學)’이라 부르는 말은 헬라스어 philosophia(필로소피아)를 번역한 ‘희철학(希哲學)’이란 말에서 나온 말이다. 본래 동북아시아는 ‘이학(理學)’ 혹은 ‘도학(道學)’이란 이름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를 두고 궁리하였다. 인도의 철학자는 자신의 애씀을 ‘다르샤나(darsana)’ 혹은 ‘따뜨와(tattva)’라고 불렀다. ‘다르샤나(darsana)’라는 말은 ‘보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그저 감각의 눈에 보이는 개별적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초월한 보편의 이치, 그것을 향한 시선을 의미한다. 마치 동북아시아에서 우주 전체의 ‘이치(理致)’를 배워 익히려 한 ‘이학’이나 ‘도학’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뜨와(tattva)’는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그것임’이란 말이다. 그 맥락의 흐름을 강조하여 옮긴다면, ‘그것 자체’가 되겠다. 즉 인도의 철학자가 보려 한 건 어쩌면 ‘그것 자체’다. 순수한 ‘그것’ 말이다. 재미나게 인도의 철학자가 자기 자신이 행한 생각의 애씀, 즉 철학을 두고 사용한 ‘다르샤나’나 ‘따뜨와’는 그들의 하려는 일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그것 자체를 봄’, 즉 ‘온전히 참된 것을 봄’이다.

이를 구체적 생각의 애씀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겠다. ‘있는 것’의 순수한 본성은 무엇일까? ‘사람’의 참된 본성은 무엇일까? 온 우주의 참된 본성은 무엇일까? 창조주의 참된 본성은 무엇일까? 창조주와 사람의 참된 관계는 무엇일까?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라는 것의 참된 본성은 무엇일까? 진지 그 자체의 참된 본성은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것이 인도의 철학자들이 궁리한 그들의 철학이다.

[다음 시간은 인도의 철학 방법론을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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