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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신학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창세기' 1장 1절을 읽고 묵상 1 하느님을 부른다는 것 (유대칠의 슬기네집)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4. 4. 2.

여러 '창세기 1장 1절' 읽고 묵상 

 

유대칠 옮기고 씀

 

참 다양한 구약 원문이 있다. 히브리어로 쓰인 마소라 사본만이 유일한 본이라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매 순간 각자의 말로 말을 걸어오는 하느님이라 생각하면 매 순간 쉼 없이 번역되고 또 번역된 경전 하나하나가 ‘역본(譯本)’이 아닌 ‘원본(原本)’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아주 오랜 과거 유대인에게 하느님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하느님을 두고, יהוה(Yah·weh), 흔히 모음이 없는 히브리 문자로 인해 YHWH로 쓰고 ‘야훼’라고 읽지만, 막상 과거 그들은 이 문자 자체를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 τετραγράμματον(테트라그람마톤))로 여기고 비록 그렇게 쓴다 해도 그렇게 읽지 않았다. יהוה(Yah·weh)라고 적지만 읽을 때는 ‘나의 주님’이란 뜻의 אֲדֹנָי(Adonai)로 읽었다. 문자로 그 문자의 발음이 서로 달랐단 말이다. 우리말로 적으면 ‘하느님’이라 적지만, 읽을 때는 ‘나의 주님’이라 읽는단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야훼’, 즉 אֲדֹנָ֣י יְהוִ֔ה(Yah·weh Adonai)라고 적혀있다면, 어떨까? יהוה(Yah·weh)는 אֲדֹנָי(Adonai)로 읽어야 하니 ‘아도나이 아도나니’라고 읽었을까? 아니다. 이때는 אֲדֹנָ֣י יְהוִ֔ה(Yah·weh Adonai)라고 쓰고 읽을 때는 ‘Adomai Elohim’이라 읽었다. 그러니 「사무엘하」 7장 19절의 אֲדֹנָ֣י יְהוִ֔ה(Yah·weh Adonai)을 두고 한국어 성경은 ‘야훼 나의 주님’이라 옮기지만, 과거 히브리인들은 그리고 그 전통에 따라 읽는다면, 이렇게 읽을 수 없고, ‘엘로힘 나의 주님’이라고 읽어야 했다. 사실 읽지 않다 보니 지금 우린 יהוה을 ‘야훼’라고 발음하지만, 그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나 멀리 있었다. 아무리 우리의 더불어 있다고 하지만, 그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사람 가운데 더 강한 이들을 두고 부르는 호칭인 ‘나의 주님’이란 호칭으로 불러야만 했던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니 말이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아람어로 번역된 ‘타르쿰 옹켈로스(Targum Onkelos)’에서 히브리어 신명사문자는 아람어 신명사문자로 옮겨져 사용된다. 바로 וְיַת

(YeYa)다. 여전히 하느님은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존재다. 어쩌면 사제의 입으로 겨우 전해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을지 모른다. 부르지도 못하는 존재, 대화를 걸 수도 없는 존재와 어떻게 대화를 하겠는가 말이다.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며 조심히 살아가는 존재, 사제를 통한 하느님의 말에 고개 숙이며 살아가야 하는 게 민중이었을지 모른다.

 

「창세기」 1장 1절,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히브리어 명칭은 אֱלֹהִ֑ים(엘로힘)이다. 이를 아람어 ‘타르쿰 옹켈로스’에선 신명사문자로 옮겼고, ‘사마리아 타르쿰(Samaritan Targum)’에선 자기식의 발음으로 따라 읽었다. אלהה(Elaha), 즉 ‘엘라하’라고 말이다. 이런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람의 호칭, 모음 없는 히브리 철자 체계에서 모음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하느님을 향한 명칭 ‘אֱלֹהִ֑ים(엘로힘)’이거나 혹은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던 יהוה(Yah·weh)의 그를 향한 또 다른 부름인 ‘אֲדֹנָי(Adonai)’, 즉 ‘나의 주님’이거나, 어찌 보면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참 멀리 있어 보인다. 시리아어로 ܐܠܗܐ(Alaha), 즉 ‘알라하’라고 하지만 이 말 역시 그 어원이 히브리어 אֵל (ʾēl)에서 나왔다. 히브리어 אֱלֹהִ֑ים(엘로힘)이나 יהוה(야훼)에서 나왔거나 그 옮긴 말이던 하느님의 호칭이 헬라스어 번역 성서인 ‘칠십인역’에 와서 달라진다. 영어로 옮긴다면, The God이라 부를 수 있는 호칭, 우리말로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거다. 히브리말에서 빌려온 말도 아니고, 히브리인의 사유 속에 녹아든 그 말도 아닌 헬라스 사람이 신을 두고 부르는 호칭이 「창세기」의 하느님으로 등장한 거다. 또 다른 헬라스어 번역 성서인 ‘아퀼라역(Aquila Ponticus)’에서도 마찬가지다. 헬라스어 ὁ Θεὸς(호 테오스)가 사용된 거다. 이런 흐름은 라틴어 번역에서도 이어진다. 하느님은 그냥 하느님이란 뜻의 라틴어 Deus(데우스)로 사용된다. 이제 하느님은 적어도 그렇게 부르지 못하는 이도 아니고, 히브리 사람의 하느님을 부르던 호칭의 번역어로 부르지도 않았다. 그냥 그 시간 그 공간, 그 민중과 더불어 있는 그들의 하느님으로 불렸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신약에 이르러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 모두의 더불어 있는 우리의 아버지 말이다. 자녀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지도 못한다면 정말 자녀일까? 이제 마음 편히 부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면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일 뿐이라 믿고 이기적 소원을 청하는 자기 이기심의 수단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지만, 항상 조심히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 그 하느님을 부르고 대화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

 

Genesis 1:1

 

Gen 1:1 [마소라 사본(Masoretic Text)]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맨 처음에 엘로힘(אֱלֹהִים(Elohim))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 תורה שומרונית)]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맨 처음에 엘로힘(אלהים(Elohim))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타르쿰 옹켈로스(Targum Onkelos)]

בֲקַדמִין בְרָא יְיָ יַת שְמַיָא וְיַת אַרְעָא׃

옛날에 하느님(וְיַת(YeYa))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사마리아 타르쿰(Samaritan Targum)]

בקמאותא טלמס אלהה ית שומיה וית ארעה׃

맨 처음에 엘라하(אלהה(Elaha))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페쉬타역(Peshitta)]

ܒܪܫܝܬ ܒܪܐ ܐܠܗܐ܂ ܝܬ ܫܡܝܐ ܘܝܬ ܐܪܥܐ܂

맨 처음에 알라하(ܐܠܗܐ(Alaha))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칠십인역(Septuaginta LXX)]

Ἐν ἀρχῇ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ὴν γῆν.

비롯음에 하느님(ὁ Θεὸς)께선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아퀼라역(Aquila Ponticus)]

Ἐν κεφαλαίῳ ἔκτισεν ὁ Θεὸς σὺν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σὺν τὴν γῆν.

첫머리에, 하느님(ὁ Θεὸς)께선 하늘을 그리고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Gen 1:1 [고 라틴어역 (Vetus Latina)]

In principio fecit Deus coelum et terram.

비롯음에, 하느님(Deus)께선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Gen 1:1 [불가타역(Vulgata)]

In principio creavit Deus caelum et terram.

비롯음에, 하느님(Deus)께선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유대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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