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이는 어떤 말에도 쉽게 흥분한다." DK22B87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말에도 쉽게 흥분한다. 그런것 같다. 여기에서 말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logos다. 뭐, 이 말은 논리나 생각으로 읽으면, "어리석은 이는 어떤 생각에도 쉽게 흥분한다"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들으면 나와 '다름'이 우선 보인다. 그 '다름'이 '그'를 '그'로 있게 하고 '나'를 '나'로 있게 하지만, 이상하게 그 다름이 싫다. 나와 다른 그는 왠지 나에게 남이라거나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서일까? 나의 힘이 흔들지 않은 어떤 영역의 확인이라서일까? 나의 끝은 남이다. 더 정확하게 내 생각은 남의 생각이다. 경계다. 그 경계, 그 다름이 싫다면 내가 그의 생각으로 채워지거나 내가 그의 생각을 채우거나 해야 한다. 그의 생각이란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의 생각에서 나는 나의 생각을 마주할 것이다. 엄밀하게 그의 생각은 없고 나의 생각뿐이니 말이다. 이것이 좋은 것일까?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라 한다.
결국 나의 생각도 그의 생각도 생각이다. 그 생각으로 나는 나로 있고 그는 그로 있다. 나의 생각이 나의 존재이고, 그의 생각이 그의 존재이다. 그의 생각에 대한 나의 폭력과 불만은 그의 존재에 대한 나의 폭력과 불만이 된다.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의 생각, 그 생각 속 그 많은 아픔에 고개 돌리고 살아다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말에 흥분한다면 그것이 바른 것일까?
이 세상엔 하나의 이치, 즉 로고스가 흐르고 그 하나의 이치, 즉 '하나의 큰 로고스'에 대한 나의 좁은 식견 속 내 생각이란 '내 로고스'와 그의 좁은 식견 속 그의 생각이란 '그의 로고스'는 겸손하게 그 하나의 큰 로고스 가운데 안겨야하는 것은 아닐까 겸손하게 말이다. 로고스가 말이란 뜻도 생각이란 뜻도 된다지만, 그 하나의 큰 로고스를 어찌 지금 나의 작음으로 다 받아 쓰겠는가. 그저 겸손하게 그 하나의 큰 로고스의 품 속에서 나는 나의 로고스에 충실히 있을 뿐이다. 그의 로고스와 더불어 말이다.
하나의 큰 로고스라는 신비, 그 신비를 나누어 가진 나와 그의 로고스도 나누어진 작은 신비일 것이다. 나와 다르지만 하나의 큰 로고스 가운데 어쩌면 하나의 존재인 그를 멀리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일까?
나무에도 나무의 로고스가 흐르고 있다. 그의 아름다움은 나와 다른 그의 나무임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나와 다른 그의 다름도, 그다움도 나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와야하지 않을까?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두고 이런 저런 잡설을 한다. 학문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분석하고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내 앞에 던져진 그의 로고스를 나의 로고스가 느껴본 정도라고 해겠다. 굳이 전문적인 학자적 식견이 아니라며 조롱은 말아주길 바란다.
2019년 11월 27일
유대칠 씀
전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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