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전쟁이 '타인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는 곧 “이기심, 자만, 증오, 그리고 타인을 파괴, 배제, 희화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권력 강화 및 지배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5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중 https://www.vaticannews.va/)
나와 다른 타자, 그 타자를 그저 자신의 경제적 이득 속에서만 본다면, 그저 자신의 수단에 그칠 뿐입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그저 수단말입니다. 타자를 그저 수단으로 삼는 사람에게 온전한 신앙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신앙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당장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온전한 사람다움이란 것이 그들에게 있을까요?
그를 있는 그대로 그로 마주한다면, 그는 나의 수단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창조 이후 아름답다 한 존재, 좋다 한 존재, 그렇게 대단한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도 나에게 돈이 되지 않으면 무시됩니다.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를 조롱하는 자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기뻐합니다. 참 이기적인 행복입니다. 신앙은 그런 이기적인 행복을 권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이기적인 행복이 악마의 드러남이 아닐까요? 자기만 웃기 위해 너를 불행을 즐기는 것 말입니다.
오히려 신앙은 그런 이기적인 웃음보다 눈물입니다. 너의 아픔을 외롭게 두지 않고 너의 아픔 앞에서 그 역시 우리 가운데 나의 아픔이라며 웁니다. 그를 향하여 기꺼이 나를 내어놓으며 웁니다. 하느님의 나라 성인들은 천국에서 마냥 웃고 있을까요? 이 땅 아프고 힘든 이들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성인들은 우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빌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울보들의 나라일지 모릅니다. 성인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며 우리 같은 아픔으로 많은 눈물 흘렸을 것이니 그들은 우리의 아픔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아픔을 너무나 잘 알아서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서 하느님에게 우리를 위하여 빌고 있을 것입니다. 눈물로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두지 않고 우리를 위해 눈물로 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그들에게 무엇이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에게 어떤 좋은 것이 돌아오지 않아도 온전히 우리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두지 않고 삶과 죽음을 넘어서 우리를 위해 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누군가를 이기고 돌아서 웃는 이기적인 웃음보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안아주며 웃는 눈물이 있을지 모릅니다. 희망의 눈물,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눈물 말입니다.
성당에서도, 같은 신앙 공동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기의 대상으로 봅니다. 자신의 눈이 그러하니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이기고 살아야한다고 지금 너무 힘들고 실패했으니,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이기적이고 더 잔인하게 이기라는 잔인한 홀로 있음의 욕심으로 살라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스스로를 더욱 더 외롭고 홀로 있게 합니다. 바로 옆 그를 위하여 우는 이를 보지 못합니다.
나와 다릅니다. 타인은 원래 나와 다릅니다. 그러나 바로 나와 다른 그이기에 나와 우리가 되어야하는 희망입니다. 돈으로도 보지 말고 자기 욕심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악마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고 남을 괴롭히고 그렇게 홀로 외롭게 죽어가지 말고, 더불어 손을 잡고 하나되어 삽니다. 하느님에게 우리된 모습으로 다갑시다. 지금 우리는 기꺼이 그를 위해 외로운 그를 위해 울수 있을까요? 나를 다시 돌아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 12. 16
포항대잠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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