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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고난 속 신앙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2. 16.

"저는 오늘 아침 이곳에 오기 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우크라이나의 한 교구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났습니다. 저는 이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들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을 타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유럽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 순교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의 공기입니다. 순교자들은 항상 우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하느님 백성 가운데 누군가 순교의 증거를 주는 것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11일 오전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 훈화 중 발췌(https://www.vaticannews.va/ko/)>

순교는 멀고 먼 이야기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어떤 종교를 믿는다 해도 죽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단이라 해도 이단 신앙을 가진 다는 이유로 죽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지구 여러 곳엔 목숨을 걸고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말 그대로 죽을 듯이 두려운 공포 가운데도 하느님을 향한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정말 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말입니다.

죽음 가운데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로 그 신앙은 이미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의 삶 속 자연적인 생존의 욕구를 이기는 무엇인가로 더불어 있기에 가능한 기적이라 믿습니다. 기적이란 것이 꼭 바다가 갈라지고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나르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기꺼이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신앙 그 자체가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 삶 속에서도 작은 모습으로 일어난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참 쉽지 않습니다. 

일상 속 작은 순간에서도 우린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에 따라서 기꺼이 나는 너와 이웃을 위하여 나의 이기심으로 부터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역시 신앙인으로의 삶입니다. 우리 가운데 너를 위해 나를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신앙인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만 신앙이 아닌 삶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나의 것을 더 챙기고, 남들보다 더 커지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우리 가운데 너와 이웃의 아픔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나를 내어 놓는 작은 고난과 양보는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나, 더 많이 드러나고 싶은 나, 바로 이런 나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너와 이웃의 자리는 지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너와 이웃을 위하여 어떤 것도 내어 놓지 못하는 이들이 과연 예수님의 길을 따라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온전히 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이기적인 것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온전히 신앙인으로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직 자신 뿐인 사람들이 과연 하느님을 위한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유한한 나'는 '무한한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나아가도 온전히 '무한한 하느님'과 하나 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고민하며 그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따라 살아가면 '유한한 나'는 '무한한 하느님'을 향하여 부수져갑니다. '나'라는 이 작디 작은 '유한한 자리'에 하느님이 온전히 계실 수 없으니 이 '작은 유한한 존재'는 하느님에게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부서집니다. 그것이 일상 속 순교입니다. '나'란 유한성에 구속되지 않고 '나의 밖 너'를 위하여 부서지는 것은 하느님을 향하여 '유한한 나'란 존재가 '무한한 하느님'을 향하여 부서지며 나아가는 어쩔 수 없는 신앙 여정의 행복한 부서짐입니다. 부서지면 아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만큼 하느님에게 다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서짐은 아픔이 아닌 행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도 부서질 생각이 없는 이에게, 어떤 것도 양보할 생각 없는 이에게,  정말 하느님을 향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순교의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일상 속 작은 순교들, 우리 가운데 너를 위하여 부서지고 이웃을 위하여 부서지는 그 작은 순교 역시 거부하고 살아가는 이에게 하느님을 향한 은총의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교의 삶을 살아가는 고난 속 신앙을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외국의 그들을 보면서 일상 속 작은 순교 역시 망설이며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 12, 15

포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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