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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2. 18.

복자 황일광 시몬(1756~1802)는 백정이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조선 시대 백정의 삶을 아시나요. 신분제 사회의 가장 아래에서 살았던 이들입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삶 자체가 아픔은 그런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조선에 오셨다면 바로 그 백정의 공간에 오셨을지 모릅니다. 가장 아프고 가장 낮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정 황일관 시몬은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라고 합니다. 그가 살던 그 세상을 천당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와 너무나 다른 신앙으로 살아가던 이들입니다. 죽음이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이들입니다. 잔혹한 고문이 멀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죽었던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삶을 산 백정이니 그 아픔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정말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아픔이 일상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천당이었다고 합니다.

백정이지만 기꺼이 안아준 신앙의 공동체, 신분제의 벽을 넘어 다가가 너 역시 나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자매라는 말과 삶에 백정 황일광은 이땅에서 천당을 경험하게 됩니다. 차별이 사라지고 사랑이 있으며, 백정의 아픔도 남의 아픔이 아닌 우리 가운데 나의 아픔이라 안아준 그 따스함에서 황일광은 하느님을 마주하였을 듯 합니다. 바로 더불어 신앙 생활을 하던 이들의 그 따스함에서 하느님을 마주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말입니다.

양반만의 조선, 그 위계의 공간에서 평등은 도전이었습니다. 양반에 대한 도전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양반은 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노비와 백정을 우리라며 품었습니다. 노비와 백정 역시 그들을 품고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라는 품속에서 따스함을 나누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던 백정에게 형제자매라며 다가선 이들의 그 따스함은 그냥 그대로 하느님의 품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이런 저런 어려운 논리가 아니라, 바로 더불어 있는 이의 그 따스함으로 전해져왔을 것입니다.

양반과 중인 그리고 노비와 과부가 더불어 성경을 공부하며 그렇게 하느님에게 우리되어 나아갔습니다. 바로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 말입니다. 우리 되어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것, 천민이라 배제하고 과부라 배제하고 또 중인이라 배제하지 않고 서로 하나되어 우리된 모습으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느님에게 온전히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우리 됨 가운데 있을 때, 서로 다른 그들은 서로의 신분이 아니라, 서로의 신성과 하느님 품에서의 형제 자매임을 보게 됩니다. 백정의 아픔은 그저 남의 아픔이 아닌 우리 가운데 나의 아픔이라는 양반의 내려놓음이 있게 됩니다. 바로 이래서 그들은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간 것입니다. 사랑의 평등, 그 평등의 마음에서 그들은 자신을 사람으로 마주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노비도 양반도 중인도 과부도 아닌 하느님의 품 가운데 형제자매인 누군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홀로 외롭게 아파하지 않아야할 더불어 살아야할 누군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땅에도 하느님 나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홀로 외로이 아픈 사람이 없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백정 황일광 시몬은 바로 그 천국은 이 땅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절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백정이 될 순 없었습니다. 우리의 밖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품안에서 하느님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 땅 초대 교회는 황일광 시몬에게 천당을 바로 이 땅에서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저런 신분의 벽을 넘어 '우리' 되어 모두가 '더불어'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그 모습이 그 자체로 하느님 존재 증명이었습니다. 

우린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손이 되어 다가가 홀로 외롭게 아프지 않게 해 주웠을까요? 우린 이 곳을 천당으로 만들려 노력하였을까요? 황일광이 경험한 그 천당, 그 잔혹한 박해의 시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그 천당, 그 천당은 지금 이곳엔 있을까요? 멀리 보지 말고 스스로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천당을 경험하게 해 주었는지?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었는지? 홀로 외롭게 있지 않게 해주었는지...?

참 부끄럽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서재성당대림특강 201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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