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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2. 20.

"천주 예수께서 한 번 작은 괴로움만 받으셔도, 온 세상의 죄를 다 넉넉히 푸실 것인데, 어찌 만고만난(萬苦萬難)을 다 받으시어 죽기까지 하셨습니까?”말하기에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주께서 죽으신 뜻은 지극히 선하시니, 대개 천주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무궁무진하기에 다시 더할 것이 없게 하려 하심입니다. 

또 천주께서 지극히 높으심과 사람의 죄가 지극히 중함을 보이고자 하심입니다. 또 당신이 이미 사람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사람도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치 말라 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또 사람이 한 가지 죄만 있을 것 같으면, 당신이 한 가지 괴로움만 받으셔도 충분하련마는,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아니한 곳이 없기에, 예수께서 거룩하신 몸에 고난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천주 성부께 제사하여 드려 우리의 희생을 그분이 대신하시니, 희생이 죽지 아니하면 제사 드리는 예가 되지 못하기에 이와 같이 예수께서 죽음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 죽으신 몸으로 성부께 제사를 드리시니, 천주 성부께서 그 제사를 받으사 사람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여 주신 것입니다."

정약종의 <주교요지>다. 초기 이 땅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바로 이 책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다. 참 기적 같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공부하고 주님을 마주한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았다. 이 책에 그려진 예수님은 그냥 그대로 사랑이시다. 왜 신이라면서 별 것 아닌 사람을 위하여 그 힘든 고난을 당하고 결국 죽게 되었을까? 그리고 정말 무한한 능력의 신이라면 죽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인데 왜 굳이 죽기까지 한 것인가? <주교요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너무 지극해서 그렇다고 한다. 너무 사랑해서 우리의 아픔을 위해, 우리의 잘못을 위해 죽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쉽게 이야기한다. 너 때문에 죽을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죽었다. 너무 우리를 사랑해서 죽었단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사랑은 다른 이유가 없어야 한다.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다. 사랑의 유일한 이유는 사랑이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으셨다. 그런 사랑을 가르쳐주셨으니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죽지 않음을 아셨을 것이지만,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금새 배신할 것을 아셨지만 그분은 기꺼이 그들 모두를 품에 안음으로 죽으셨다. 그 사랑 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사랑 처럼 우리 가운데 나 아닌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너를 위해 기꺼이 더불어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정약종의 <주교요지>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하느님에게 우리를 위해 간구함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화해하여  더불어 있게 하려 했다 하였다. 우리는 우리 아집으로 계속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지는데 하느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 우리의 곁에 더불어 있으며 우리를 위해여 죽으셨다. 그에게 어떤 좋은 것도 없었지만 기꺼이 우리를 위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것이 신앙이어야하고, 이것이 우리의 이웃 사랑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어찌 그리도 많이 채찍으로 아파하셨을까?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은 곳이 없기에 주님의 몸에서 고난 받지 않은 곳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주님을 향하여 몇 번의 채찍을 들었을까?

주님은 우리의 아픔이 남의 아픔이 아니라며,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지면서 아집의 쾌락에 빠져 웃으며 "나는 너보다 더 강하다", "나는 너보다 더 부자다", "나는 너 보다 더..." 이런 외침 속에서 홀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서 강자로 살아가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을 향하고 그들의 편이 된 이들, 그 외롭고 아픈 모습, 서로 싸우고 욕하고, 심지어 사랑으로 다가오는 이들마저 자신에게 고개숙이지 않는다며 비난하고 모욕하는 세상, 예수님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 세상, 그 세상의 모습, 가짜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불행을 행복이라 생각하는 그 모습,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라 이 세상 그 무거운 아집을 깨기 위해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신 분, 우리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두지 않은 예수님, 그렇게 남의 아픔이 아니라 나의 아픔이라며 이 세상 가장 아픈 곳에서 아프게 사시다 돌아가신 분, 그런데 우린 아프기 싫다며 서로 싸우고 이기려 노력한다.

사회 정의나 외치는 곳이 교회냐 소리치고, 공부나 하는 곳이 교회냐 소리치면서 말이다. 주님 품에서 멀어지면서 말이다. 사회 정의를 고민하며 교회밖으로 빛을 내기 위해 교회에 오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주님 뜻을 궁리하며 공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싫고 그냥 성당에서 대장질 하기 위해 주님 믿고 따라야 할 교회에 올 뿐이다. 정약종과 같은 조선 후기 우리 신앙의 선조는 가진 것도 버리며 주님을 따라 백정도 벗으로 노비도 벗으로 안아주며 살았다. 사회 정의를 위하여 하느님을 뜻을 궁리하며 살았다. 그런 모습에 어느 백정은 고난과 고문 그리고 죽임 속에서 아프게 살았지만, 바로 이런 모습이 하느님 나라라며 힘들지만 좋은 세상 살았다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이젠 이런 것이 싫다고 한다. 대장이 되기 위해 성당에 나오고, 자기 사업을 위하여 성당에 나오고, 방해가 되면 비방하고 모욕한다.

기억하자.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시다. 그렇게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다. 제발 그 분을 따라 살아가보자. 그러면 이미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시 시작했을 것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2019 12 19

 

전주 전동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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