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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분이십니다(Deus non uocis sed cordis audior est). 치쁘리아누스는 크고 요란한 기도 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으로 하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형제자매가 하나되어 하는 기도, 누군가 더 나서는 기도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안아주면서 하나 되어 올리는 기도, 그런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나 누군가 자신의 과도한 욕심으로 큰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이들을 두고 "하느님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참 바른 가르침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봉사했으니 내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당연히 높임을 받으면서 신앙을 해야 한다는 그 마음.. 2019. 11. 24.
기도하는 이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나 청원함에 있어 절제하고 조용하고 ‘부끄러움(pudorem)’이 있어야 합니다. 치쁘리아누스의 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나 청원함에 있어 절제있고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조금 의미를 좁혀서 신앙이란 것을 가진 이들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에게 기도한다지만, '우리'라는 말이 참 어색하게 이기적 기도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의 행복과 나의 소유와 나의 권력과 나의 높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심지어 조금 높은 자리에 오르고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조금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가지고 '나'를 도운 하느님이라며 자랑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부유함은 누군가의 아픔을 조건으로 가능한 세상입니다.. 2019. 11. 23.
중세 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중세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이 철학이 될 수 있는가? 나의 존재론적 과거, 나의 근원적 토대, 그 출발점(arche)를 상기한다는 것은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역시 지금 여기 있는 이 존재의 존재론적 근원을 향하여 상기하는 것일 수 있으며, 그 상기 자체, 그 기억함 자체가 그의 철학에 있어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물리적으로 과거에 있던 일을 기억한다는 것이 철학이 될 수 있을까? 남의 나라, 남의 과거, 그 공간과 시간이 모두 남인 그들의 시간과 공간 속 철학을 그들의 남으로 있는 나란 존재가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은 그냥 과거 일에 대한 기억인가 철학인가? 제대로 알지 못한 지적 호기심의 만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일까? 과거의 중세를 기억한.. 2019. 11. 23.
결국 이 철학사는 고민에 대한 궁리들에 대한 풍경화다. 왜 그들은 따지고 물었나? 결국 무지의 고백으로 이어질 것을 알면서 왜! 왜 따지고 물었나? '신의 있음'을 사람의 힘으로 증명해낼 수 있다 생각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미 무지의 고백이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물었다. 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사람의 힘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가? 아니다. 처음부터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사람의 앎 속에 온전히 들어오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에 영구히 남아 있을 물음이다. 그런데 왜 따지고 물었는가? 왜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했는가? 결국 답 아닌 답을 두고 다시 묻고 답하고 다툰 까닭은 무엇인가? 어쩌면 신에 대한 그 물음들은 사람을 향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신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다루고 정의하고 싶었던 것은 가장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 2019.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