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518

이응노의 풍경 1950 이응노의 1950년 작품 '풍경'이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다. 사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철학사를 객관적 사실이라 보았다. 철학사의 주체가 가진 시선이 객관적이라 믿었다. 아니 그 정도의 고민도 없이 그냥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 풍경이 주관적 사실이듯이 철학사 역시 주관적 사실이다. 주관적 사실이란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순간이 때론 그 크게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저런 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그려진 풍경화는 추상화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추상은 주관의 자신감이다. 내가 나오 있을 때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것을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 사물의 모습들이 살짝 보인다. 그러.. 2020. 8. 9.
서로 다른 몸짓이 우리를 이루고 있다. (2020 07 28) 누가 주인공인가? 보는 이들은 저마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바로 옆의 한 몸짓과 완전히 떨어진 분리된 홀로 있음으로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이게 주인공이구나 싶어 보면 그가 주인공이기 위해 옆의 몸짓이 필요하다. 홀로 주인공이 아닌 기대어 있는 주인공이다. 기대인 주인공은 제대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린 대부분 기대어 있다. 온전히 홀로 행복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살아가지만 못한다. 아무도 업는 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해도 결국 그를 품고 안아주는 곳은 그를 우리라 부르는 옆의 사람이다. 너를 죽이고 혹은 너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워도 그냥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부끄러움이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2020. 7. 28.
대한민국철학사는 슬픔 없이 죽은 철학과에 바치는 눈물이다. 철학과 폐과가 확정되던 그 달... 철학과는 전국단위 철학회를 열었다. 여러 대학 교수들은 폐과도 모르고 마지막 잔치에 찾아왔다. 학회가 끝나고 술마시고 잼나게... 그날 나 역시 그 혼돈 속에 이게 정말 없어지는지 아닌지... 학교 측에 묻고 물었다. 그리고 확정... 또 철학과는 사라질거다. 어쩌면 지방사립대에서 없어질듯하다. 그래도 누구하나 슬퍼하지 않는 죽음일거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외국 철학자 누구누구가 철학의 최전선이라 하겠지만 막상 현실속 죽어가는 슬픔 없는 죽음은 힘없는 이 땅 지잡대 철학과다. 내 는 그 죽음에 대한 눈물이고 분노이다. 죽은 그 상흔에서 피는 꽃의 싹을 기대하며 말이다. 유대칠 2020 07 24 2020. 7. 24.
이응노 만나기 -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여럿이고,여럿이고 여럿이지만 하나이고... "나와 너는 '우리'라는 전체, '우리'라는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다. 아무리 '나는 나만으로 그만이다'하며 홀로 있으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나'가 아니다." 유대칠, 450쪽.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지만 둘이 아니고... 그렇다. 경우에 따라선 셋도 넷도 다섯도 그렇다. 여럿이라 보이지만 실상 하나이다. 하나는 하나가 아닌 여럿이며, 그 여럿이 하나를 이룬다. 하나를 이루는 여럿은 하나를 위한 여럿이 아닌 저마다의 여럿이지만, 저마다의 여럿이라 하여 저마다 다투고 싸우는 여럿도 아니다. 하나지만 하나 아닌 여럿이고 여럿이지만 여럿 아닌 하나이고, 하나이며 하나이고 여럿이며 여럿이며 여럿이고 하나이다. 내가 생각하는 더불어 있음이란 어쩌면 저와 같다. 나란 한 존재도 분명히 너무나 선명한 .. 2020.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