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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그는 지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첫째 이웃입니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2. 27.

"함께 걸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교부 사제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교구 사제는 여러분의 첫째 이웃입니다. 사제는 주교의 첫째 이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첫째 이웃은 사제입니다. 사제는 주교에게 반드시 필요한 협력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제에게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말아야하고 아버지, 형제, 그리고 친구처럼 돌봐야합니다." (2013년 9월 19일 새주교 선임을 위한 회의에서 하신 말씀)

오랜 시간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 과거부터 권력을 가진 종교인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은 여러 종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가 이어온 것은 선한 우리의 이웃인 본당의 사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에선 비록 큰 인기 없지만 일상의 이런 저런 어려움에도 열심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제를 이웃으로 생각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제 당신도 나를 이웃으로 안아주지 않았기에 나도 그렇게 한 것이라는 식의 이기적인 생각은 이제 그만하려 합니다. 나쁜 사제도 있지만, 그 나쁜 사제를 위해 기도하며 변하지 않은 하느님의 그 뜻을 품고 살아야하는 것이 또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선한 사제의 몫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교를 탁하게 만든 것은 사제만의 몫이 아닙니다. 일상의 공간에서 평신도는 바로 옆 사람에게 하느님 계심의 모습을 증거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평신도로 나의 삶이 과연 하느님의 뜻과 얼마나 가까울까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감성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기도는 아니였을까 돌아봅니다.  가만히 이성적으로 나를 돌아보면 나는 하느님의 뜻을 이웃에 전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과연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부끄럽습니다. 그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면 그냥 배제하고 무시하고 그런 것은 아니였나 돌아봅니다. 나의 신앙, 이 신앙만이 진짜이고 너의 신앙은 거짓이라 조롱하진 않았나 돌아봅니다. 지금 그리스도교의 이런 저런 탁함이 과연 사제와 목사 그리고 수도자만의 몫일까요? 아닐 겁니다. 결국 나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인이라지만 그리스도교인답게 살지 못한 이들 때문입니다. 나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쉽게 눈에 보이는 누군가, 사제를 탓하고 수도자를 탓합니다. 

이제 분노에 앞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궁리하는 가운데 보이지도 기억되지도 못하는 몸짓이지만, 이런 저런 권력에 지워지고 잊혀진 작디 작은 몸짓이지만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향하여 우리에게 이웃으로 다가와 손잡고 가자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몇몇 사제는 나를 이웃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려 합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이웃으로 위해 분노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려 합니다. 홀로 잘 난 맛에 가는 걸음이 아니라, 느리지만 결국은 천천히 모두가 하나 되어 하느님을 향하여 더불어 나아가야 함을 믿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제를 생각하면 요즘 눈물이 납니다. 아쉬움의 눈물이 아닙니다. 고마움의 눈물입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희망의 눈물입니다. 사제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우리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 계심의 증거로, 그렇게 희망으로 다가서길 기도합니다. 말 뿐인 기도가 아니라, 비록 별 것 없이 초라한 나이지만 주어진 이 길에서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실천하여 살아봅니다.

2013년 교황님의 강론... 오늘 저에게 깊이 다가옵니다.

사제는 그저 지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첫째 이웃입니다. 

사제도 수도자도 목사도... 우리 그리스도교인에게 첫째 이웃입니다...

 

2019년 12월 27일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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