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나는 리디오를 듣는다. 항상 하루에 어느 정도를 폰으로 듣거나 인터넷으로 들었다. 이젠 아예 라디오를 구해다 듣는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말이 나오는 방송보다는 음악이 많은 방송, 가사가 많은 음악보다는 음악이 많은 방송을 듣는다. 그러다보니 KBS 클래식을 듣게 되었고, 지금은 아예 그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지금도 바이올린 곡이 울리고 있는 중이다. 가사가 없으면 그 음악의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더 편하게 그 음의 흐름에 마음을 얻어 둘 수 있다. 가사의 직접적인 의미 전달보다 내가 이런 저런 언어의 강요 없이 음에만 집중해 볼 수 있다. 나는 폰을 자주 보지만 내 폰엔 게임 어플도 없고 다음 어플도 없고 검색 엔진의 어플도 메일 확인을 위한 것을 제외하면 없다. 구글은 books에 고정되어 있고, 유독 pdf 관련 어플이 많이 깔려 있다. 나에게 폰은 논문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는 메모장이기도 하고, 남의 논문을 읽는 수단이기도 하다. 폰에도 음악이 있긴 하다. 오랜 과거의 가요 몇 곡과 조성진과 손여름 그리고 임현정 등의 피아노 연주곡과 몇몇 외국 오랜 과거 연주자의 첼로 연주곡이 있다. 요즘 밖을 나서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걷는 시간 그리고 지하철을 타는 시간 나는 손여름과 스베틀린 루세브의 연주를 주로 듣는다. 가요를 듣기도 하지만, 대부분 가사 없는 곡을 들으며 길을 걷는다. 가사의 강요, 가사 속 이런 저런 사연 속에 나의 지난 과거를 돌아볼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지금 나의 귀를 울리는 그 음의 흐름에서 나는 나와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루 동안 무엇을 몇 시간 했는지 하나하나 그냥 낙서처럼 적고 지운다.
불안의 흔적이다. 논 시간이 길면 불안하다. 남들은 나에게 폰을 오래 보느니 텔레비전을 오래 보느니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내 하루 시간을 하나하나 기록한다. 나는 절대 일정 비율을 넘어서지 않으며, 글노동의 시간은 작년 12월 이후 거의 12시간 정도를 유지한다. 심지어 그냥 앉아서 소설을 읽든 낙서를 하든 글노동을 한다. 그리고 30여분에서 1시간 정도는 멍하게 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멍하게 있는다. 나의 뇌에 대한 배려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는 라디오를 듣거나 그냥 음악을 듣는다. 아직도 글노동의 시간이 줄어들면 불안하다. 놀고 있다는 생각, 왠지 쓸모없어진 느낌이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러지 말라는 남의 말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 스스로도 알지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좋아진 편이다. 하지만 나의 불안과 강박은 많이 좋아진 편이다.
광주 가는 버스에서도 나는 폰으로 논문을 읽으며 다녔다. 그 시간도 놀면 왠지 미안스러웠다. 죄스러웠다. 버스 밖 풍경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없었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광주대구 고속도로가 통제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 역시 큰 일이 날 뻔했었다. 하여간 그 사고로 내가 탄 버스는 고속도로가 아닌 길로 나와야했다. 광주로 가는 또 다른 길을 가야했다. 그렇게 논길과 밭길 사이, 그 이후로도 그 전에도 가본 적 없는 익숙하지 않은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길로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개된 상황 속에서 나는 우연히 창밖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정돈된 길이 아닌 길에도 광주 가는 길은 있었고, 조금 멀고 조금 험하지만, 아름다웠다. 큰 깨우침이다.
남들 보기 화려한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것이 정말 나에게 아름다운 답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내 답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루 한번 별 생각 없이 듣던 라디오를 이젠 더 즐긴다. 지금 바이올린 곡 이후 흘러나오는 피아노곡의 흐름도 너무나 아름답다. 곡의 제목을 외울 생각도 없고 곡에 대한 학문적인 깊이를 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귀를 스치며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 모든 하나하나의 음이 아름다운 나와의 인연이고 나의 귀를 걸처 나의 혼에 새겨지는 순간들이다. 공부 없이 나는 음악을 즐긴다. 과거와 같이 그 곡에 대하여 사전을 찾고 검색하고 그러지 않는다. 그러면 즐기기 전에 지친다.
나 역시 나 스스로의 눈으로 나를 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야한다는 답 속에서 나를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마주하기 싫어지고 나의 이름이 힘겨운 무게감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나는 너무 힘들어진다. 지금 나는 울리는 음악이고, 설령 울리는 불협화음도 나란 이름의 교향곡의 한 부분이다. 그 역시 소중하다. 나란 교향곡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현대곡일 수 있다. 나만의 울림이 아닌 나의 주변 나와 우리를 이루는 이들과의 인연이 이 곡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할 것이다. 온전히 나와 생물학적 남이지만, 나와 살아가고 있는 아내, 어떤 혈연도 없이 나와 함께 하는 사람, 그러니 생물학적 혈연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된 이들보다 더 고마워해야할 사람인 그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항상 엉성하다. 그러나 내 아이들과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아내가 만나 이루어진 두 개의 거대한 우주가 아닌가. 이들과의 시간 역시 내 곡의 큰 울림이다.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벗과 나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과의 만남 역시 내 곡의 큰 울림이다. 굳이 어떤 가사로 이 곡을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시키고 싶지 않다. 이상하게 복잡한 제목으로 이 곡을 고정시키고 싶지도 않다.
여전히 나는 많은 강박과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내 존재의 무게감이라 생각한다.
부끄럽지만 내 책의 글귀가 생각난다.
“그 유일한 해결책은 ‘너’다. 나의 웃음에 웃어주는 ‘너’다.” (<대한민국철학사> 565쪽)
나의 생각만을 강요하지 않고, 나의 길만을 강요하지 않고, 나의 취향과 기호만을 강요하지 않고, 너를 마주한다. 그 너는 나의 밖 너이기도 하고 나의 안 나라는 너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매일 부서지고 매일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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