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뜻풀이>
무엇으로 영구히 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 무엇으로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없는 것입니다. 첫 사람이 시작할 때 그 사랑은 영원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들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픈 이별을 남깁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어느 순간엔 사라져 과거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나고 사라지고 다시 나고 사라집니다. 쉼 없이 반복됩니다.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한때 목숨 같은 사랑도 사라지고 다른 사랑이 찾아오고 한때 영원한 답 같던 이념도 어느 순간 과거의 낡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있는 모든 것의 운명입니다. 나의 밖은 그렇게 변화합니다. 있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나의 안은 나의 밖의 이것을 무시하고 변하지 않아야 한다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게 나의 안은 나의 밖과 나누어져 버립니다. 하나의 세계는 그렇게 갈라져 버립니다. 사실 나의 안도 나의 밖과 더불어 변화합니다. 없던 사랑이 생기고 생긴 사랑이 사라지고 그럽니다. 저주 같은 미움도 있다 없어지고, 세상 전부 일 것 같은 욕심도 있다가 없어집니다. 나의 안도 그렇게 변화합니다. 사라지고 사라지고 또 나서 나고 또 납니다. 나의 안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합니다. 화가 가득하다가 웃음으로 가득하고 웃음으로 가득하다 눈물로 가득하고 그렇게 나의 안은 쉼 없이 변화합니다. 나의 안도 변화하고 나의 밖도 변화하고 그 사이 '나'는 고정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 고정되어 영원하다면 이 둘을 나누고 선 담이 될 것입니다. 나도 역시 같이 변화합니다. 그러면 나의 안도 나도 나의 밖도 하나 되어 변화하는 그 무엇이 될 것입니다.
굳이 말하면 나는 그저 있습니다. 무엇으로 있지 않고 사실 그저 있습니다. 그것이 나입니다. 나의 있음만을 보고 그것에 대하여 이런저런 여러 수식어로 치장하지 않으면 나의 있음은 저기 저 길가 잔디밭 잡초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잡초도 그저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그저 있습니다. 나는 잡초라며 아무렇지 않게 그냥 밝고 지나가지만 그도 나도 사실 이 우주의 거대함에서 생각하면 작은 먼지도 아닌 몸짓입니다. 그냥 그저 있는 것이며, 있다는 것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밖을 함부로 이름 짓고 가치를 결정해 버립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이름도 영원하지 않은 찰나의 것이며, 작디작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건방진 폭력입니다. 그저 조용히 잡초를 보며 한 동안 있으면 개미도 보이고 이름 모를 이런저런 풀들도 모이고 또 잘 모를 벌레들도 보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함부로 이름 붙이고 가치를 매기며 그들의 신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도 사라지고 너들도 사라지고 나도 아픔을 알고 그도 아픔을 압니다.
참된 자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원래 모습으로 원래 그대로 알아듣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이 나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영원하게 있지 않고 무엇으로 있는 듯 하지만 없는 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밖에 대해서도 함부로 이름 붙이고 가치를 매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신이 되거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아집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즉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반야심경은 고집을 부리지 말라는 주문입니다. 우리가 사실이라 믿는 것이 사실은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문입니다. 어리석으며 어리석은 대로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문입니다.
허수 유대칠 풀이
<한문 역본과 한글역본>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密多時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 다시
우주의 온갖 것들이 있다 없어지는 까닭을 자유로이 보고 행하는 이의 큰 지혜를 얻고자 할 때,
照見 五蘊皆空 渡 一切苦厄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뜻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부딪쳐 느껴 알게 되는 이 다섯 가지는 사실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것임을 볼 때, 이 세상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舍利子
사리자
큰 지혜를 얻으려는 이여!
色不異空
색불이공
보이는 사물의 참됨은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空不異色
공불이색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것은 보이는 사물의 참됨과 다르지 않습니다.
色卽是空
색즉시공
보이는 사물의 참됨은 곧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것입니다.
空卽是色
공즉시색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것은 곧 보이는 사물의 참됨입니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과 생각과 행함 그리고 의식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舍利子
사리자
큰 지혜를 얻으려는 이여!
是 諸法空相
시 제법 공상
이 모든 법의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그 모습은
不生不滅
불생불멸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며
不垢不淨
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不增不減
부증 불감
늘어나는 것도 불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 무색 무수 상행식
그러므로 무엇으로 있는 듯 없는 가운데 보이는 사물의 참됨도 없고, 느낌도, 생각도, 행함도, 의식도 없습니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안이 비설 신의 무 색성향미촉 법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뜻도 없고, 눈에 참으로 보이는 것도 없고, 소리도, 향도, 맛도, 감촉도 온갖 사물의 영구한 이치도 없습니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無無明 亦無 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 老死盡
무무명 역무 무명진 내지 무 노사 역무 노사진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명(明)은 지혜를 뜻한다. 무명이란 곧 지혜가 없음이다. 모든 것은 연기법에 의해 상호의존적으로 있다는 지혜가 없음, 그것을 모름이다. 그러니 무명이란 그런 지혜 없이 독립적으로 따로 홀로 있다는 것이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 고집멸도 무지 역무 득 이 무소득 고
'괴로움'과 '괴로움의 까닭'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 이 모두가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까닭에
普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故
보리살타의 반야 바라밀다고
보살은 반야 바라밀다의 큰 지혜에 의지함으로
心無罣碍
심무가애
마음에 걸림이 없으며
無罣碍故
무가 애고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어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유 공포 원리 전도 몽상 구경열반
뒤바뀐 헛된 생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완전한 자유(열반)에 들어갑니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縟 多羅三藐 三菩提
삼세제불의 반야 바라밀다고 득아뇩 다라삼먁 삼보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 시간 속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 바라밀다, 즉 큰 지혜에 의지함으로 으뜸 가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故知 般若波羅蜜多
고지 반야바라밀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이 큰 지혜를 알아야 합니다!
是大神呪
시대신주
이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是大明呪
시대명주
이는 가장 밝은 주문이며
是無上呪
시무상주
이는 가장 높은 주문이며!
是無等等呪
시무등등주
이와 똑같은 주문은 그 어디에도 없는 주문입니다!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능체일체고 진실불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허망하지 않을 수 있으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이 큰 지혜의 주문을 말하니. 주문은 이와 같습니다.
揭帝 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서 가자! 평안의 저 언덕으로 넘어 가자.
揭帝 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帝 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허수 유대칠 옮김
오랜 전의 것이다. 다시 다시 또 읽고 조금 더 많이 수정 의역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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