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혜의 조선 후기 철학
강의 1: 왜 ‘호락논쟁’을 강의하려 하는가?
나는 철학사를 ‘정치-존재론’의 관점으로 읽어간다. 철학사란 지난 철학을 돌아본다는 것이고 나는 지난 철학의 삶을 그런 관점에서 돌아본다는 말이다. 나의 책 <대한민국 철학사>도 어쩌면 그러한 맥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화려한 형이상학적 논의들도 대체로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진지하게 다룬 거의 모든 형이상학적 고민들은 정치적 맥락 속에서 활용되었고 폐기(廢棄)되었다. 설령 철학자의 의도가 그렇지 않아도, 그 철학자의 철학은 그렇게 소비되었다. 어쩌면 철학의 쓸모는 바로 그것이었다. 정치적 필요 말이다. 플라톤에게 <국가>와 <법률>은 어쩌면 자기 철학의 이유다. 그가 철학을 한 이유는 그저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교양을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인 부조리의 세상에 대한 그의 ‘정치 존재론’적 대안 제시다. 그렇기에 그의 철학은 매우 정치적이다. 읽어봐라. 그 책들은 정치적인 것으로 두고 고민한다.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정치학>을 보자. 결국 그의 철학도 사람이 잘 살기 위한 고민이다. 그냥 무엇인가 고민해서 한 고민이 아니라, 설령 그렇게 말한다 해도 철학자의 철학이 죽지 않고 살아간 이유는 정치적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불교(佛敎)도 다르지 않다. 도교(道敎)라도 다를 것도 없다. 모두 그렇다. 특히 유교는 가장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철학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를 위한 철학이다. 윤리도 정치를 위한 윤리로 보일 만큼 유교의 고민은 정치적이다. 유교의 존재론적 담론 역시 너무나 선명하게 정치적이다. 사실 전 세계에서 가장 선명한 그리고 노골적인 ‘정치-존재론’은 바로 조선의 성리학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 다룰 조선의 ‘정치-존재론’은 바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다. 종종 ‘호락이학’(湖洛二學)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호락설변’(湖洛說辨)이라 소개되기도 하지만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익히는 철학사는 대체로 서구 중심이다. 철학사 개론이란 수업은 대체로 서구 철학 중심이다. 그런데 사실 서구 철학사도 제대로 읽어본 이가 많지 않은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조선 철학사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익힌 것이 마지막인 이들이 제법 많다. 그들에게 호락논쟁은 그리 익숙하지 않다. 들어 보았다 해도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하면 막힌다. 어디 호락논쟁만 그런가?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실 모른다고 봐야 한다. 무시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지금 형편이 그렇다. 이러한 것을 몰라도 그만인 시간을 살았다. 그런데 앞으로 진행하며 알겠지만 우린 바로 앞선 시대 이 논쟁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받아오고 있다. 우리가 성리학이라면 떠올리는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 논쟁과 무관하지 않다. 호락논쟁은 18세기 초반에서 19세기까지 이어져온 조선 성리학의 논쟁이다. 그 이후로 조선이란 나라가 사라졌으니 어쩌면 조선 성리학의 이름난 마지막 논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이 논쟁의 주인공들은 국사 시간에 한번쯤 들은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노론(老論) 학자들이다. 노론이란 말부터 이미 국사 시간에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노론 학자들은 충청도와 서울 지역으로 그 철학의 내용이 달랐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다. 서울의 다른 이름이 낙양(洛陽)이다. 이들 이름에서 따서 이와 관련된 충청도의 이론을 ‘호론(湖論)’이라 하고, 서울의 이론을 ‘낙론(洛論)’이라 한다. 바로 이들 ‘호론’과 ‘낙론’ 사이의 논쟁이라 하여 ‘호락논쟁’이라 부른다. 지금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이 논쟁은 조선 성리학사에선 매우 중요한 논쟁이다. 16세기 그 유명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그리고 ‘고봉 기대승’ 등 사이에서 이루어진 ‘사단칠정논쟁’과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왕실의 ‘복제 논쟁’이었던 예송(禮訟) 논쟁과 함께 ‘호락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3대 논쟁이다. 사실 이들 사이의 역사도 제법 할 이야기가 있지만, 지금은 그 가운데 마지막 논쟁, 18세기와 19세기 논쟁인 ‘호락논쟁’만에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호락논쟁 자체도 익숙하지 않지만, 그 이름으로 논쟁한 것들도 우리에겐 거의 외계(外界)의 고민 수준이다. ‘마음의 본질’에 대한 고민으로 ‘미발심체(未發心體)’가 첫 고민이고, 이어서 ‘사람’의 본성과 ‘사람 아닌 것’의 본성은 같은가를 고민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이 둘째 고민이다. 다음은 ‘성인(聖人)’과 ‘성인 아닌 이’의 차이에 대한 ‘성범심’(聖凡心)이다. 결국 이 모든 고민도 매우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것을 철학의 언어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호락논쟁의 중심에선 ‘이간’은 미발의 심체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원진’은 미발의 심체도 선악의 가능성이 함께 있다고 하였다. 이들 사이의 논쟁이 바로 ‘미발심체 논쟁’이다. 남은 두 개는 그냥 드러난 논쟁의 언어만 보아도 조금 과하게 이야기하면 양반과 양반 아닌 것은 그 본성이 같은가의 문제이며, 한족과 한족 아닌 것에 대한 본성에 대한 고민이다. 결국 이 고민은 한족 아닌 오랑캐인 청나라에 대한 태도와 무관할 수 없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걸치며 무너진 양반의 사회적 위상에 대한 고민과도 무관할 수 없다. 만일 양반의 본성이 양반 아닌 이의 본성과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당연히 존재론적으로 양반과 양반 아닌 이는 서로 다르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존재론적 입장에 따라 사회적 위계 역시 달라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 철학적 사실, 존재론적 사실이라면서 말이다. 이제 알겠는가 이 물음이 왜 정치적인지 말이다. 앞으로 바로 그 고민을 따져볼 생각이다. 밖으로는 현실로 존재하는 강대국 청나라를 그리고 안으로는 양반 아닌 이들과 여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조선이란 ‘자아’가 고민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건방지게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 고민에 대한 조선의 답은 조선을 지키지 못했다. 조선 후기 철학사의 이런저런 논쟁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대안을 찾을 수 없다. 사라진 나라, 그것도 정치적으로 보자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무척이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사라진 나라, 바로 그 나라의 마지막 철학적 몸부림이 조선 후기 철학이기 때문이다. 인물성동이 논쟁이란 것이 옛이야기가 아닌 지금의 이야기로 고민된다면, 그것이 문제다. 사람 아닌 것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하여 완전히 새롭게 생각하자는 현대 철학자들의 철학적 결실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지금에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존재론적 위계에 대한 고민으로 보이는 그런 부류의 고민이 과연 무슨 의미겠는가? 당장 브뢰노 라투르(Brono Latour, 1947-)와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 등의 철학적 결실들을 보란 말이다. 만일 지금 현대 철학이 있다면, 지금 서구의 현대 철학과 대화 가능한 것이면 좋겠다. 서구 철학과 더불어 새로운 담을 논하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존재론적 우위와 위계를 따진다? 과연 이것이 새로운 생태철학과 자연 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는 요즘, 그리고 남녀의 위계 문제에 대하여 오랜 나쁜 관습에서 벗어나야하는 요즘, 그저 과거의 고민일 뿐이어야 한다. 그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어야 한다. 본 강의가 그럼에도 조선 후기 철학을 강의하려는 것은 사라졌으면 좋을 과거의 폐습(弊習)에 대한 확인이다. 그것을 지금의 눈에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눈으로 돌아가 따져보며 수행하려 한다. 벗어나려면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확실하게 알아야 확실하게 과거형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유식혜 씀
2020 12 28
신간! 유대칠이 번역한 쿠사누스의 <감추어 계신 하느님에 대한 대화>
www.bookk.co.kr/book/view/98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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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서점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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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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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대한민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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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신성한 모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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