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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31.

대장장이 쭌다의 공양으로 싯다르타는 눕게 됩니다. 좋은 마음으로 함께 하려 한 공양이 싯다르타의 마지막을 부르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마지막에 쭌다를 걱정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탓을 하며 어찌 하나 걱정을 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제자 아난다에게 부탁합니다. 

"이보시오, 아난다. 누군가 쭌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요.
'쭌다여! 그대의 공양으로 스승께서 마지막 열반에 이르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실수 때문이오!'
그러나 쭌다의 슬픔을 이와 같이 말해주시오.
'친구 쭌다여! 그대의 공양을 마지막으로 드시고 스승께서는 열반에 드신 것은 그대의 공덕이며 행운입니다. 이보시오, 쭌다여, 나는 이 말씀으로 스승이신 부처님에게 직접 들었소'" (마하빠리닙바나 경 4,42)

싯다르타는 자신이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리고 특히나 자신의 제자들이 쭌다의 탓으로 그를 아프게 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누워 그의 탓을 하지 말라 부탁하며 동시에 싯다르타를 죽인 것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하고 힘들어할 쭌다를 위로할 길을 알려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탓을 합니다. 누군가 미워할 이유가 생기면 그에게 함부로 말을 합니다. 아프고 아프게 함부로 말을 합니다. 그러면 혹시나 실수를 저지를 자신은 더욱더 감옥에 빠져 힘들어합니다. 실수를 실패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변하고 변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죽는 것이 이 대자연의 이치입니다. 죽는 것이 있어야 다시 태어나는 것이 있는 것도 대자연의 이치입니다. 싯다르타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쭌다의 탓도 아니고 그냥 원래 그러한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타는 (तथाता, tathātā)는 '그냥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그리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생기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생깁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슬픈 것은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아집'의 결과입니다. 아집으로 인하여 사람은 아프고 힘들고 때론 싸우고 미워합니다.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데 변화하면 누구의 탓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사랑은 변합니다. 이별로 변하기도 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있지만 또 다른 사랑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연인의 뜨거운 사랑이 아닌 부부의 사랑으로 변하기도 한단 말입니다. 처음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보면 이 세상의 참모습, 즉 진여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나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란 존재가 이렇게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무엇으로 고정되이 영구히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무엇임은 항상 변화하고 바뀝니다. 한마디로 나는 있지만 무엇으로 있지 않으며, 영원히 있지도 않은 그러한 존재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고요. 베란다에 작은 고추 모종을 키우기 시작하여 지금은 아침이면 그 고추 모종의 고추를 봅니다. 한참 보고 있으면 나는 어느 순간 고추의 벗이 되어 있습니다. 산책을 할 때 흐르는 금호강을 보면 나는 어느 순간 금호강의 벗이 되어 흐르고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하는 나는 항상 더불어 있는 것들 속에서 쉼 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싫어 고집을 보면 고추는 그저 먹어야 하는 것이고, 금호강은 그냥 지역 하천입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사마귀가 되기도 하고, 메뚜기가 되기도 하고, 무당벌레가 되기도 하고, 달팽이가 되기도 하며, 구름과 바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쉼 없이 변화하다 나는 그곳으로 사라져 버리겠지요. 결국 그것이 나란 존재의 전부입니다. 

싯다르타의 죽음도 당연히 찾아온 죽음입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냥 일평생 더불어 있으며 빚진 것에게 온전히 그 빚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바람에게 내 숨을 돌려주고 물에게 내 피를 돌려주고 흙에게 나의 살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스승 싯다르타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아집은 싯다르타의 죽음 앞에서 누군가의 탓을 하게 하고 미워하게 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을 제자 아난다에게 알리자 아난다는 슬퍼합니다. 

"나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스승께서 사라지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나의 앞에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집입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 합니다. 그냥 이치에 따라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 것이고 지금 그 이치의 순간에 온 것일 뿐,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리고 태양이 뜨면 낫이 오듯이 당연한 이치일 뿐, 아집을 내려놓으면 슬픈 일이 아니라 정말 죽음의 마지막 순간 가르침을 남깁니다.

"아난다, 슬퍼 울지 마세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미 많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태어난 모든 것은, 있는 모든 것은, 만들어진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을 바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모든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라집니다. 기억하시고 쉼 없이 부지런히 정진하세요."

사라짐 앞에서 슬퍼말라.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저 당연한 일이 당연히 일어난 것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이 지혜의 말씀을 남깁니다. 그러면서 슬퍼말고 더욱더 깊이 정진하라 부탁합니다.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은 종교를 죽어서 좋은 곳 가는 수단이나 죽어서 갈 곳에 미리 좋은 땅을 마련하는 투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욕심이 없이 사라짐을 마주할 때, 비워져 있는 나에게 충실히 살아갈 때, 나는 나와 더불어 있는 수많은 존재의 몸짓들이 남이 아닌 나의 몸짓이 됩니다. 아집이 사라진 비워진 곳은 쉼 없이 수많이 채워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채워집니다. 그렇게 나는 아집이 흐르고 흐르다 죽게 되겠지요. 죽음은 결국 흐르고 흐르는 강이 바다에 이르듯 그렇게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마지막입니다. 슬픈 일이 아닙니다. 

싯다르타의 마지막 가르침은 제자들을 울리지 않고 더욱더 단단하게 정진하게 합니다. 

유대칠 

2020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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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모두가 홀로 누리며 홀로 높아지려는 시대, 그 아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들이 아프고 힘든 시대, 참된 더불어 행복하게 위한 더불어 있음의 철학과 더불어 있음의 신학을 궁리해 본다. 우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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