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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당함'과 '행함'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6. 6.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순수한 행함만이 더욱 더 온전한 그 무엇이라 생각했다. 무엇인가로 부터 당한다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닌 존재, 무력한 존재, 의존적인 존재, 나약한 존재로 보았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 부터도 당하지 않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되려 했고, 그런 존재를 참으로 온전한 존재라 생각했다. 신 역시 그러한 존재라고 생각한 듯 하다. 많은 종교는 수많은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지만, 스스로는 죽지도 않고 늙어지지도 않는 존재, 그런 존재를 신이라 생각했다. 문학적으로 감성적으로 신도 운다 하지만, 신은 이 세상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 자신의 존재엔 어떤 변화도 없는 그러한 존재, 즉 신은 철저하게 홀로 있음의 존재다. 물론 몇몇 종교인이가 신앙인은 이런 저런 특수한 사례들을 거론하며 아니라고 하겠지만, 지난 역사를 보면 종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을 죽이고 괴롭혔다. 신의 뜻으로.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이고 괴롭혀도 그 신앙은 울지 않는다. 그들이 향하는 그 신 역시 울지 않는다. 신의 뜻은 그렇게 차갑다. 

신의 자리에 사람이 올라선 지금, 사람은 자연을 마음대로 변화하려고 한다. 그런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자산의 마음애도 자신의 능력적인 힘에 따라서 수둥적인 존재들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자연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강자의 능동성만이 강하게 되면 그 자연은 결국 파괴된다. 이것이 자연스럽다. 그러한 능동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능동은 수동의 소멸되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며 사라진다. 그것이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보다 더 영속하는 자연은 당함과 행함의 주종 관계의 유지가 아니라, 당함과 행함의 더불어 있음이다. 나는 능동적인 주체이지만, 동시에 수동적인 주체다. 나는 분명히 나의 생각으로 나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야할 주체성을 능동적으로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 존재 가치를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너에게서 얻는다. 아버지인 나는 아들과 딸인 너에게 그저 외로운 홀로 '나'가 아닌 더불어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 앞에서 나는 수동적이다. 나는 능동적으로 있고자 하지만, 동시에 무엇으로 있고자 한다. 그 무엇임은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너와 더불어 있을 때 나에게 주어진다. 

그렇게 나의 주체성은 당함과 행함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둘은 나의 주체성에서 서로 남이 아니다. 

유대칠 씀

2020.06.05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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